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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549
한자 金元祥
영어음역 Gim Wonsang
이칭/별칭 문광공(文匡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여성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몰년 1339년연표보기
본관 안산
대표관직 판삼사사

[정의]

고려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산(安山). 아버지는 충익공(忠翊公) 김위(金渭), 어머니는 충원군부인 안씨(安氏), 처는 둘인데 첫째는 박씨(朴氏)이며, 둘째는 황려군부인 민씨(閔氏)로 민지(閔漬)의 둘째딸이다. 아들로 김성경(金星慶), 김주경(金珠慶)이 있으며, 사위는 창원부원군(昌原府院君) 왕우(王瑀)이다.

[활동사항]

김원상은 1284년(충렬왕 10) 문과에 급제하여 주부,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냈다. 1302년(충렬왕 28) 비서윤(秘書尹)이 되었으며, 이어 지감찰사사(知監察司事), 지신사(知申事), 자의밀직사사(咨議密直司事) 등을 거쳐 좌승지가 되었다. 연회를 즐겼던 충렬왕을 위해 석천보(石天補), 오잠(吳潛)과 함께 전국에서 이름난 기생들을 뽑아 올렸다가 왕을 황음(荒淫)하게 한 죄로 파직되었다.

이후 다시 복직되어 지신사, 밀직부사를 거쳐, 1309년(충선왕 1) 검교평리(檢校評理)가 되었다가 회주목사(懷州牧使)로 좌천되었다. 특히 충렬왕충렬왕충선왕 부자를 모함하여 이간시켰다가 이들 사이의 오해가 풀리자,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전선(銓選)을 김도(金瑫)에게 넘겨주려 하였으나 김도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320년(충숙왕 7) 삼사사(三司使),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으며, 심왕(瀋王) 고(暠)를 고려왕으로 옹립하려 하였다. 이로 인해 충숙왕이 원나라에 불려가는 등 국내 사정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 1322년 충숙왕이 다시 고려로 돌아와 국정을 잡자, 이 사건에 연루되어 섬으로 유배되었으나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곧 풀려났다. 1339년 6월 판삼사사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가요 「태평곡(太平曲)」을 지었다 하나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기생 적선래(謫仙來)에게 「태평곡」을 가르친 뒤 충렬왕 앞에서 부르게 하자 왕이 듣고 지은이의 재주를 칭찬하여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라는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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