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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438
한자 日帝强占期
영어음역 Iijaegangjeomgi
영어의미역 Japanese Colonial Period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진각

[정의]

1910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 경기도 안산의 역사.

[행정제도]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조선을 병합하는 강제 조약을 체결하고 통감부를 확장·개조하여 식민지 최고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설립하였다. 이어 일제는 강점 직후인 1910년 9월 ‘조선총독부관제’와 ‘조선총독부중추원관제’ 등의 법령을 반포하여 지배기구의 기본 골격을 마련하고, 아울러 ‘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를 실시함으로써 지방 지배의 기본 골격을 마련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어 10월에는 ‘도·부·군의 명칭과 관할구역’, ‘면에 관한 규정’ 등의 총독부령을 발포하고, 이어 1911년 2월에는 도·부·군에 자문기관으로 참사(參事)를 두는 법령을 제정하여, 이를 바탕으로 과도기적인 지방 지배기구, 즉 부·군·면의 3단계 행정체계를 확립하게 되었다.

당시 안산시는 안산군이었는데, 1912년 2월 5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거 와상리(瓦上里), 와하리(瓦下里)를 와리(瓦里)로, 삼리(三里)와 사리(四里)를 사리(四里)로, 본오리(本五里)와 분오리(分五里)를 본오리(本五里)로, 이목동(梨木洞)과 능내리(陵內里)를 목내리(木內里)로 합치는 등 종래의 9개면 75개리를 병합하여 9개면 37개리로 개편하였다.

이어 1914년 3월에는 조선총독부경기도령 제3호 「면의 명칭 및 경계 획정」으로 안산군(安山郡) 군내면(郡內面)·인화면(仁化面)·초산면(草山面)을 합하여 시흥군(始興郡) 수암면(秀岩面)으로, 마유면(馬遊面)·대월면(大月面)·와리면(瓦里面)시흥군 군자면(君子面)으로, 성곶면(聲串面)·북방면(北方面)·월곡면(月谷面)수원군(水原郡) 반월면(半月面)으로, 남양군(南陽郡) 대부면(大阜面)부천군(富川郡) 대부면으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식민 통치를 위한 것이었다.

[경제생활]

조선총독부는 합법을 가장한 토지의 강탈 작업으로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을 실시하였다. 이 결과 대다수 농민이 토지를 상실, 소작농·화전민·임금노동자가 되었다. 또한 1918년 개정된 지세령에서는 결부제(結負制)를 폐지하고 지가(地價)에 따른 지세의 납부로 바꾸어 과세지 한 필지의 지세액인 지가의 1.3%를 1년 세액으로 책정하였다. 이로써 지세액은 1911년보다 1.6배나 증가하였다.

지세는 원칙적으로 지주 부담이었으나 모두 소작농에게 전가되면서 소작료의 인상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안산 지역에서는 3·1운동 이전에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인 농민의 반대 시위는 보이지 않고 있으나, 뒷날 3·1운동 때 비석거리 시위의 주동자의 한 사람인 홍순칠(洪淳七)이 “우리가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가 된다.”고 농민들을 만세 시위에 참가하도록 설득하였다. 이를 볼 때 농민들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의 중심 과제였던 국유지 창출 과정에서 제일 큰 피해자였으며, 이에 따라 소작농으로 전락한 열악한 처지에 대한 반발이 매우 컸음을 말해준다.

1930년대 접어들면서 일제의 조선총독부 주도로 진행된 농촌진흥운동이 전개되었다. 수암면을 중심으로 ‘졸업 후 지도’라는 명목 아래 자작농 창출작업이 진행되어 당시 총독과 13도의 도지사가 방문할 정도로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나, 주도자였던 하야시[林虎臟] 안산보통학교 교장이 토지 투기에 연루되면서 중지되었다. 반월면 지역에서는 팔곡리를 중심으로 오야마[大山綱擧]가 주도하는 농촌진흥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고구마의 새로운 재배법을 보급하여 ‘오야마식 고구마 재배법’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농가 소득에 일정한 기여를 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식민 지배가 이루어지면서 교통과 통신, 전기 등 근대적 시설도 정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적 시설은 편리성을 제공해 주기는 했으나, 설치의 근본 목적이 식민지 지배와 수탈을 용이하게 하는 데 있었다. 안산 지역은 전형적인 농어촌이었기 때문에 근대적 시설 정비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바닷가를 중심으로 일본에서 도입된 천일염 제조 염전이 들어서기 시작하였고, 생산이 활발해지자 이를 수송하기 위한 수인선(水仁線)이 1937년에 가설되었다. 육로교통의 경우 경부선이 안양 쪽으로 비켜가면서 이를 연결하기 위해 안양·수암 간의 도로가 1928년에 착공되어 이듬해 개통하였다.

[교육제도]

안산 지역의 전통 교육기관 중 대표적인 것은 안산향교였다. 그들은 조선을 강점하기 직전 향교 재산을 정확히 파악하고자 각 도(道)의 향교 소유지 실측에 착수한 바 있었다. 하지만 전답의 측량이 부정확하고 수입도 불확실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1908년 7월 23일 「향사리정(享祀釐正)에 관한 건」을 발하여 향교 재산을 정부 소관으로 이속시켰다. 이어 1910년 4월 23일에는 학부령(學部令) 제2호로 「향교재산관리규정(鄕校財産管理規程)」을 발포하여 이를 구체화하였다.

향교 재산은 1910년대를 통하여 향교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을 제외하고, 수입의 60% 이상에 해당하는 금액이 보통학교 운영비로 전용되었다. 안산향교의 경우 1899년 이미 향교를 안산소학교로 사용하였고, 일제 강점 직후에는 안산공립보통학교 교사(校舍)가 있음에도 교실 부족을 이유로 향교를 교사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향교의 공적 교육 기능을 신교육이 대체해가는 과정에서 향교가 점차 소외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향촌사회에서 기득권을 갖고 지역 유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던 일부 향촌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실망과 불만을 가져다주게 되었다. 안산 지역에는 중등교육기관은 한 곳도 없었으며, 초등교육기관은 1899년 안산소학교가 세워졌고 1912년 안산공립보통학교로 바뀌었다. 1921년에 대부공립보통학교, 1923년 반월공립보통학교와 군자공립보통학교가 세워졌으며, 1939년 성포 간이학교(簡易學校)가 일시적으로 운영되었다.

[항일운동]

1919년 3월 30일 오전 10시 수암면에서는 비석거리[碑立洞]에 18개 리(里)에서 2,000여 명의 주민이 모여 윤병소(尹秉昭)·유익수(柳益秀)·홍순칠(洪淳七)·윤동욱(尹東旭)·김병권(金秉權) 등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있었고, 이튿날은 반월면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31일 대부면에서는 김윤규(金允圭)·노병상(盧秉相)·홍원표(洪元杓) 등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고, 4월 4일 군자면에서는 강은식(姜殷植)·김천복(金千福) 등이 주도하는 시위가 있었다. 권희(權憘)는 장수산 군자면 내의 구(舊)시장 터에서 시위를 모의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고 주모자들은 체포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 농촌계몽 운동 및 문맹퇴치 운동이 전개되면서 YWCA에서는 최용신(崔容信)을 안산의 샘골에 파견하여 농촌 야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지역의 유지들과 YWCA의 지원으로 건물을 신축하고 계몽 운동에 주력하였다. 한편으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방학을 이용하여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8월 수암면 김완식(金完植), 반월면 박희준(朴喜雋), 군자면 민건식(閔健植)·안상옥(安商玉), 목내리에 최운식(崔雲植) 등이 활동하였고, 1933년 8월에는 수암면 월피리 목영만(睦榮萬), 수암면에서 이원식(李元植)이, 1934년 8월에는 군자면에서 차상동(車相同) 등이 한글 교육을 전개하여 민족혼을 불어넣는 활동을 벌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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