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1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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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黑山錄 |
영어공식명칭 | Heuksallok |
이칭/별칭 | 『흑산기사(黑山記事)』,『흑산일록(黑山日錄)』,『기미흑산일록(己未黑山日錄)』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은주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851년 - 장석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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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926년 - 장석영 사망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919년 - 『흑산록』 저술 |
성격 | 일기 |
작가 | 장석영 |
[정의]
1919년 장석영이 성주 지역에서 활동한 내용을 일부 기록한 일기.
[개설]
『흑산록』은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1851~1926]이 성주의 만세 운동과 파리 장서(巴里長書)로 인한 투옥과 석방 등을 겪으며 이 과정에서 발생한 일을 상세히 기록한 것이다. 초고본이 있으며, 후손들이 교정·정사(淨寫)한 교정본은 『선문별집(先文別集)』 지(智)에 전한다.
[구성]
1919년 음력 2월 2일부터 11월 1일까지 292일간의 일기이다. 장석영은 파리 장서의 초안자이자 서명자로서 성주경찰서에 호출되어 9일을 체류하였고, 이어서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어 항소 공판까지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일기의 내용은 독립운동과 관련된 자신의 경험적 사실이 주를 이룬다. 다만 날마다 기록한 것이 아니라 특기할 만한 일이 있을 때만 기록하였는데, 이는 출옥 후 기억에 의존하여 쓴 일기이기 때문이다.
[내용]
성주의 만세 운동과 파리 장서 운동으로 인한 투옥 과정 및 옥중 생활, 그리고 심문과 석방 과정 등에 기술이 집중되어 있다. 여타 일기에서 흔히 보이는 날씨나 생활 속의 잡사는 생략되어 있으며, 분량 면에서도 붙잡힌 과정과 함께 성주경찰서와 대구감옥에서 보낸 135일의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순서대로 대체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울의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간 것을 소개하고 있다. 둘째, 「통고도내문(通告道內文)」, 「총독부 장서(總督府長書)」, 파리 장서를 쓰게 된 경위와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셋째, 성주경찰서에 소환된 자세한 내용과 8일간 체류한 경험이 서술되어 있다. 넷째, 대구감옥으로 이송되는 과정과 초심 공판까지 34일간의 옥중 생활을 기록하였다. 다섯째, 초심 공판에서 항소 공판까지 93일간의 옥중 생활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섯째, 석방되는 과정과 성주로 돌아가는 과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곱째, 조선의 태평을 기원하는 시를 수록하였다.
전체적으로 서사, 본사, 결사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첫째와 둘째는 자신의 투옥에 대한 원인을 서술한 서사, 셋째부터 다섯째까지는 체포되어 감옥에 있으면서 겪은 다양한 일을 서술한 본사, 여섯째와 일곱째는 석방 과정과 평화에 대한 염원을 표출한 결사로 이루어져 구조적 완결성을 가진다. 이는 『흑산록』이 여타 일기가 갖는 주제의 분열성을 최소화하고, 독립운동이라는 하나의 통일적 주제를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징]
『흑산록』은 초고본과 교정본이 전하는데, 『선문별집』에 전하는 것은 초고본을 문집 형태로 다시 편집한 것이다. 초고본과 교정본 사이에는 몇 가지 상이한 지점이 있다. 첫째, 형태적으로 편책의 방법, 글자 크기, 쪽수 등에서 차이가 난다. 둘째, 교정본에서는 일기와 작품을 구별하여 산문과 한시 및 시조 등 운문 작품이 있으면 줄을 바꾸고 다시 한 글자를 내려 쓰는 방식을 취하여, 궐자(闕字)를 하거나 줄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내려쓴 초고본과 필사 방식을 달리하였다. 셋째, 교정본에는 장석영의 형 장석신의 시 8수가 추록되어 있다. 넷째, 초고본과 교정본에는 글자의 출입이 발견되고 교정본에는 오기가 더러 보인다.
[의의와 평가]
『흑산록』의 최대 가치는 학계에서 그동안 현존하지 않는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리고 있던 회당본 파리 장서가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흑산록』에는 장석영이 파리 장서를 쓰는 과정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스스로 앞장서서 파리 장서를 기획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장석영이 파리에 독립 청원서를 보내는 일이 유림의 일이며, 또한 조선의 독립을 위해 가장 긴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자료를 통해 독립운동 과정과 독립운동으로 인한 당시 장석영의 수감 생활을 자세하고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장석영은 이송 당시의 상황이나 대구감옥의 구조와 생활 규칙 등을 다양하게 기록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 사상 매우 중요한 지역인 성주가 부각되어 있다. 성주는 당시 파리 장서에 서명한 사람 수가 군 단위로서 전국에서 가장 많은 15인이나 되는 곳이다. 이는 파리 장서의 초안이 성주에서 작성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까닭에 장석영은 자신처럼 파리 장서와 관련하여 투옥된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서술하였는데, 이는 성주 월항면 한개에 살았던 침산(枕山) 이수인(李洙仁)[1880~1962] 관련 기록 등에서 잘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