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844
한자 鄭在蘷
영어공식명칭 Jeong Jaegi
이칭/별칭 성로(成老),성재(省齋)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1년 9월 11일연표보기 - 정재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 정재기 파리 장서 서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8일 - 정재기 성주경찰서 출두 통보에 불응
몰년 시기/일시 1919년 4월 9일연표보기 - 정재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3년연표보기 - 정재기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1년연표보기 - 정재기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정재기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한강길 19[수성리 850]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정재기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활동지 정재기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묘소 국립 대전 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3]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성로(成老), 호는 성재(省齋). 문목공(文穆公)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13세손이다. 아버지는 정세용(鄭世容), 어머니는 옥산 장씨(玉山張氏)이다. 외숙부는 장승택(張升澤)이다.

[활동 사항]

정재기(鄭在蘷)[1851~1919]는 1851년 9월 11일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한강길 19[수성리 850]에서 태어났다. 외숙부 장승택에게서 수학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종에게 을사오적의 처단과 을사늑약의 파기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기 위해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 등 영남 유림 300여 명이 상경하여 「청주적신파늑약소(請誅賊臣罷勒約疏)」를 올렸는데, 이때 연명 상소자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서울에서 시작된 3.1 독립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무렵,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김창숙(金昌淑) 등은 프랑스에서 개최되고 있는 파리 강화 회의에 유림단의 이름으로 한국 독립을 청원하기로 하였다. 이때 작성된 파리 장서[독립 청원서]에 한국 유림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파리 장서에 서명한 유림단 137명 가운데서 ‘서명자 중 가장 저명한 자’ 중의 1명으로 일컬어질 정도의 원로 유생이었다.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이 작성한 「통고 국내문(通告國內文)」에도 조카 정종호(鄭宗鎬)와 함께 서명하였다.

파리 장서 운동[제1차 유림단 의거]은 1919년 4월 2일 전개된 성주군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의 주동 인물들이 잡혀 조사받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었다. 이후 파리 장서 운동에 관련된 유생들이 전국 각지에서 주재소나 헌병파견대 및 경찰서로 불려 나가 조사를 받고 훈방되거나 아니면 상급 기관으로 압송되었다.

1919년 4월 8일 성주경찰서로부터 출두 통보를 받았다. 그렇지만 “내가 만약 소환에 응하면 전후로 죄를 추궁하기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짐승들의 감옥에서 자진(自盡)하느니보다는 내 몸을 온전히 하여 죽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하며 호출에 불응하고, 다음날 4월 9일 아침 자택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유림으로서의 자존감이었다. 파리 장서 운동으로 자결 순국한 경우로는 전국에서 유일하다.

[묘소]

2009년 6월 국립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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