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2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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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槎日錄 |
이칭/별칭 | 탐라일기,남행일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문기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이증(李增)이 제주 어사로서 순무할 때의 일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
[편찬/간행 경위]
이증[1628~1686]은 1679년(숙종 5) 10월 불법으로 재물을 탐했다는 전 제주 목사 윤창형(尹昌亨)과 정의 현감 상인첨(尙仁詹)의 일을 조사함과 동시에 문무시재(文武試才)를 시행하고 민정(民情)을 살피기 위해 안핵겸순무어사(按覈兼巡撫御史)로 제주에 파견되었다.
이와 별도로 비변사(備邊司)에서 13개 조의 해야 할 일을 내렸는데, 군기와 방어시설 점검, 삼읍 수령의 민정, 시취(試取), 한라산신제 시행, 효자 절부의 포상 등이었다.
『남사일록(南槎日錄)』은 이때 임무를 수행하며 보고 들은 것을 일기체로 기록한 것이다. 허목(許穆)은 이것을 두고 『탐라일기(耽羅日記)』·『남행일기(南行日記)』라고 하였다.
[형태/서지]
간행 연대 미상의 필사본인데, 영인본은 2001년 제주문화원에서 발간한 『남사일록』에 수록되어 있다. 책 마지막에 1681년 허목이 쓴 글[이원외의 탐라일기에 쓰다(書李員外耽羅日記)]이 있다.
[구성/내용]
구성은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과 유사하다. 제주 어사로 파견된 경위와 비변사 13개 조목, 제주로 오는 여정, 순무에 대한 기록, 돌아가는 여정의 네 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순무에 대한 기록이 가장 비중이 높다. 별방진에서 수산진에 도착한 1680년(숙종 6) 2월 18일부터 2월 24일 차귀진으로 갈 때까지의 과정에서 당시 서귀포 지역[정의현·대정현]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주로 군기·군액·봉수와 연대의 점검 내용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김정의 『제주풍토록』, 임제의 『남명소승』, 김상헌의 『남사록』, 이원지의 『탐라지』 등을 인용하여 역사지리의 내용도 담고 있다.
수산진을 출발하여 서귀소에 도착하는 정의현 지역의 순무는 제주목과 마찬가지로 진과 봉수·연대가 있는 곳을 따라 진행되었다. 이증은 오조포연대 근방의 폐허가 된 잠복사(潛伏寺)를 지나기도 하고, 수산진·성산·정의객사에서 감회를 적은 시의 운을 따서 시를 짓기도 하였다.
정의현성에서는 교생(校生) 15명을 불러 고강(考講)하고, 80세 이상 남녀 노인 32명을 불러 경로잔치를 베풀었으며, 정의향교에서는 봉안된 신위에 참배하고 잘못된 위차(位次)를 이상하게 여겼다.
서귀소로 가는 도중 의귀원(衣貴院)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마을 뒤에 있는 녹산(麓山)의 풍수가 좋아 김만일(金萬鎰)의 후손이 귀하게 된 것으로 보았다. 서귀소에 다다라 정방연(正方淵)과 문섬[文島]·섭섬[森島]·범섬[虎島]의 장관을 구경하고, 잠녀(潛女)들이 따서 준 해산물을 받기도 하였다.
서귀소를 출발하여 차귀진에 도착하는 대정현 지역의 순무는, 성폭천(盛瀑川)[서귀포시 중문동 소재]에서 기다리고 있던 대정현감을 만남으로써 시작된다. 성폭천에 오기 전 구경한 천지연(天地淵)이 박연폭포 보다 그윽함과 깊숙함이 뛰어나 이를 신선과의 인연으로 표현하였다.
이증은 색달원(塞達院)에서 점심을 먹고 당포(唐浦) 연대, 천라수(穿螺藪), 산방악(山房岳)을 거쳐 대정현성에 도착한다. 이곳에서도 정의현과 마찬가지로 고강을 하고 노인잔치를 베풀었는데, 6명 중 4명이 참석하였다. 단산(簞山) 밑으로 옮긴 대정향교를 거쳐 모슬포로 가는 중간에 산방산(山房山)과 송악(松岳)을 구경하고 자신의 감회를 적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남사일록』은 17세기 후반 서귀포 지역의 방어 시설 및 생활 풍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아울러 김상헌의 『남사록』[1601]과 이형상의 『탐라순력도』[1702]의 내용을 시기적으로 보완해 주고 있다.
이는 17세기까지 초반 숙소로 이용되었던 영천관과 법화사가 17세기 후반에는 의귀원과 색달원으로 대체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