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21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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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春驛 |
이칭/별칭 | 이종모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종안 |
출생 시기/일시 | 1923년 - 남춘역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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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41년 - 남춘역 가요 콩쿠르 총결선 1등 레코드 예술상 수상 |
활동 시기/일시 | 1963년 - 남춘역 제1회 청룡영화제 특별 연기상 수상 |
활동 시기/일시 | 1964년 - 남춘역 제7회 부일영화상 특별상 수상 |
몰년 시기/일시 | 1963년 8월 24일 - 남춘역 사망 |
출생지 | 남춘역 출생지 - 전라북도 군산시 흥남동 |
성격 | 가수|영화배우 |
성별 | 남 |
[정의]
전라북도 군산 지역 출신 가수이자 영화 배우.
[개설]
남춘역의 본명은 이종모(李鐘模)이고 1941년 가수가 됐다. 일본으로 건너가 데뷔곡 「그림자 고향」, 「왕모래 선창」 등을 취입하였고 총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활동 사항]
남춘역은 1923년 전라북도 군산시 흥남동 말랭이[고지대]에서 태어났다. 1941년 4월 태평 레코드사가 개최한 가요 콩쿠르 대회 군산 예선을 어렵게 통과했다. 1941년 5월 서울 제일 극장[훗날 한일 극장]에서 열린 총결선에서 1등으로 레코드 예술상을 차지하면서 가수가 됐다. 일본으로 건너가 데뷔곡 「그림자 고향」, 「왕모래 선창」 등을 취입했다.
남춘역의 가수 인생은 순탄하지 못했다. 1등 은컵을 들고 고향에 내려오니 와병중이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쟁이놈이라며 멸시했다. 그 무렵 군산에 들어온 악극단을 따라 상경하여 황금좌, 신태양 악극단 소속 가수로 떠돌다 1945년 해방 후 배우가 되었다. 그러나 구두 수선공, 보일러공, 뱃사공, 식당 보이, 광부, 어부 등 외로움을 씹고 살아야하는 밑바닥 인생 배역만을 도맡았다.
1959년 어느 날 정치 깡패 임화수가 희극 배우 김희갑이 말을 듣지 않는다며 주먹과 발길로 짓이겨 늑골 세 대가 나가는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옆에는 당시 잘 나가는 배우가 여럿 있었으나 누구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고, 남춘역과 주선태가 꼬꾸라지는 김희갑을 부축해서 병원으로 옮겼다. 이를 항상 감사하게 생각했던 김희갑은 훗날 자서전에서 이같은 사실을 밝히고 있다.
남춘역은 마흔이 넘은 나이로 극단 신협의 「갈매기떼」에 19세 소년으로 출연하는 등 열정을 다했지만, 건강이 따라주지 않았고 오랜 세월 괴롭혀 온 요독증과 기관지 천식이 악화되어 1963년 8월 24일 사망하였다. 남춘역의 장례식은 배우 협회장으로 치러졌고, 요절을 슬퍼하는 행렬이 종로 거리를 메웠다고 당시 언론은 전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남춘역은 1963년 12월 제1회 청룡 영화제에서 특별 연기상을 수상했다. 이미 고인이 된 후여서 상패는 후배 장혁에게 전해졌다. 1964년 3월에는 『부산 일보』가 주관하는 제 7회 부일 영화상에서 특별상(特別賞)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