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21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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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希磾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재용 |
출생 시기/일시 | 미상 - 김희제 전라북도 군산도에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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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221년 - 김희제 몽고 사신 저고여의 접반사(接伴使)를 시작으로 외교관 역할을 함 |
활동 시기/일시 | 1223년 - 김희제 의주, 정주, 인주를 침략한 금나라 우가하를 물리치고 서북면 병마 부사로 승진 |
활동 시기/일시 | 1226년 - 김희제 우가하의 침입을 물리치고 압록강 건너 석성을 쳐서 항복 받음 |
활동 시기/일시 | 1227년 - 김희제 전라도 순문사에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227년 - 김희제 사망 |
출생지 | 군산도(群山島) -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리 |
거주|이주지 | 개성 - 미상 |
부임|활동지 | 충청도 - 미상 |
부임|활동지 | 의주 - 미상 |
부임|활동지 | 서북면 - 미상 |
부임|활동지 | 전라도 - 미상 |
성격 | 고려 무신 |
성별 | 남 |
대표 관직 | 의주 분도 장군(義州分道將軍)|전라도 순문사(全羅道巡問使) |
[정의]
고려 후기 군산도 출신의 무신.
[개설]
김희제는 고려 고종 때의 무인으로 군산도 출신이나 조상을 따라 개성으로 이주하여 적을 옮겼다. 『고려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관직 생활은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개성으로 이주한 지 오래지 않아 낮은 관직인 산원(散員)에서 시작해 충청도 안찰사(按察使)까지 직책이 상승한 시기다. 이때 청백하다는 평판을 받으며 장군으로 전임하게 된다.
다음으로 1221년(고종 8)에서 대략 1222년까지 이르는 시기로 몽고 사신을 접대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몽고 사신 저고여(著古轝) 등이 자신을 접대하는 사람을 놀리다가 갇힌 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눈에 띄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약 2~3년간 외교적 역할을 하다가 그 공을 인정 받아 의주 분도 장군(義州分道將軍)으로 국경을 책임지게 된다.
『고려사』는 김희제가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전쟁을 치러 이겨낸 사건을 연달아 보고하고 있다. 금(金)나라 원수 우가하(于哥下)와 관련된 사건인데, 김희제는 두 건 모두 승전했으나 상을 받지 못했다.
1227년 전라도 순문사(巡問使)라는 직함을 맡았다가 최의를 모해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고 나주에서 잡히자 두 아들과 함께 바다에 투신 자살하였다.
[가계]
김희제는 본래 군산도(群山島)[현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 사람이다. 선조가 상선을 따라 개성으로 가서 살다가 개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대몽 항쟁기에 많은 공을 세운 김희제는 동북면병마사, 서북면병마부사 등을 거쳐 전라도 순문사에 이른 무신 관료이다. 용모가 아름답고 지혜와 용기가 있어 최우의 신임을 받았으나, 모함을 받아 자결하였다. 아들 김홍기는 고종 때 추밀원 부사를 지낸 조염경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딸은 추밀원 판사를 역임한 정통보의 아들 정상(鄭相)에게 시집갔다.
[활동 사항]
당시의 평가 중 하나인 고종의 의견을 보면, 김희제는 담력과 지략이 있고 또 시(詩)와 예법도 잘 알며 언변도 능란하였다.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많은 일화가 있는데, 몽고 사신 저고여 등이 관반[접대원]을 놀리고 희롱하자 관반이 작당하여 저고여를 가둔 일이 있다. 외교적으로 매우 곤란한 이 상황이 김희제의 개입으로 해결되었다. 이후에도 김희제는 곤란한 상황을 매우 잘 해결하였는데, 이러한 모습이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하던 무인의 기개와 닮았던지, 조정은 김희제에게 국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겼다.
『고려사』에서는 이 시기의 김희제에 대해 자세한 서술을 하지 않는다. 다만 금나라 원수 우가하의 침략에 대처했던 두 사건만을 기술했을 뿐이다. 그 기술에 의하면 두 번의 사건에서 김희제의 행동에는 몇 가지 유사성이 있다. 첫번째, 적은 병사로 대승을 거두었다. 둘째, 조정의 명령을 받지 않았다. 두번째 사건은 다른 병마사의 지시로 이미 패배한 적을 다시 한번 급습한 것으로, 김희제는 승리만을 거두고 온 것에 불만을 품었던 듯하다. 우가하의 사과를 받는 것이 고려의 국가적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관계 부서에서는 명령 없이 토벌을 수행한 김희제에게 죄를 물으려 했으나 김희제는 자신을 아끼던 최이에게 미리 통기하여 벌을 면할 수 있었다. 대승을 거둔 일이지만 상을 받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희제가 이후 모함을 받아 죽음에 이르게 된 것도 일을 처리함에 있어 기개를 중시하고 절차를 무시하는 그의 행동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