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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1697
한자 劇場
이칭/별칭 일본인이주,일본인 거류 민단 역소,금만 평야,조선 상설관,동아 백화점,군산 부인 교육회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위경혜

[정의]

개항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군산에 존재한 극장과 극장 공연 문화.

[개설]

일제 강점기 군산은 금만 평야가 쏟아내는 막대한 곡식을 일본으로 반출(搬出)하기 위한 수탈 전진 기지로 기획되면서 근대 도시로 성장하였다. 금만 평야는 동진강 하류에 형성된 김제 평야와 김제, 군산, 익산 그리고 완주에 걸친 만경강(萬頃江) 하류에 형성된 만경 평야를 아우르는 말이다. 주요 곡창 지대인 금만 평야의 존재로 인해 군산은 일본인 이주(移住)와 근대 도시 문화 유입이 일찍부터 진행되었다.

군산에 처음으로 등장한 극장은 명치좌와 군산좌이며, 이들 극장은 1906년에서 1914년 사이 문을 열었다. 명치좌는 조계지(租界地) 형성에 따라 격자형으로 구획된 군산의 도심 명치통에 자리한 것으로 확인될 뿐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따라서 죽성동에서 문을 연 군산좌가 지역 극장의 시조로 평가된다. 군산좌는 군산은 물론 전북 최초 옥내 공연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군산좌는 1920년대 개복동에서 개관한 희소관(喜笑舘)과 함께 일제 강점기 지역 극장을 대표하였다.

1920년대 군산좌희소관은 일본 제국의 문화 정치 실현 장(場)이자 조선인 문화운동이 펼쳐지는 공론장(公論場) 역할을 수행하였다. 1930년대 군산좌군산 극장으로 개명을 하고 건물을 신축하여 개복동에서 재개관하였다. 또한 군산 극장은 조선인 상설 영화관으로 전환되었지만, 대다수 조선인의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영화 관람은 특정 집단에게만 허용되었다. 게다가, 극장은 일제 권력 아래 타자화(他者化)된 존재로서 조선인의 정체성을 환기시키는 자리였다. 일본인 중심 도시로 기획·발전한 군산의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 우열과 차별 논리는 무척이나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이주와 극장 개관]

군산은 근대화와 함께 일개 작은 어촌에서 근대 도시로 빠르게 변화한 지역이다. 1900년대 초반 군산에 일본인 거류 민단 역소(居留民團役所)가 설치되고 일본인 유입이 이뤄졌으며, 이주한 일본인들은 농사가 아니라 투기를 목적으로 군산의 토지를 사들였다. 1906년 군산의 전체 인구수는 5,000여 명에 이르렀고, 군산 도심은 우편국, 병원, 은행, 경찰서, 언론사, 학교 등 기반 시설을 모두 갖추게 된다. 1914년 군산은 6개의 여관과 5개의 요리점 그리고 군산 공원(群山公園)까지 생겨났다. 군산의 극장 역시 식민지 사업 투자처이자 근대 도시 문화의 제도로 등장하였다.

군산의 일본인과 조선인 종족 간 거주지 분리는 극장의 위치와 성격에 반영되었다. 군산좌는 단층(單層) 목조 건물로서 당시 조선인 중심 상권 지역인 강호정[현 죽성동]에서 문을 열었다. 죽성동은 일본인 거류지 끝자락인 죽성리(竹城里)로서 일본 거류 민단 주요 사업의 일부였던 유곽(遊廓)을 만들 때 후보지로 거론된 지역이었다. 죽성동은 근처의 죽성 포구[일명, 째보 선창]의 존재로 인해 조선인 객주를 중심으로 영업하였는데, 객주 가운데 개성 상인이 다수를 차지하여 ‘송방 거리’로 불리기도 하였다.

군산좌는 1930년대부터 군산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개복동(開福洞)에서 새로운 역사를 이어갔다. 1920년대 중반부터 군산좌의 건물 신축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는데, 1926년 극장 신축 예산과 부지 선정이 이뤄지고 1929년 건물이 ‘이미 착공중’인 것으로 언론에 보도되었다. 군산 극장은 3만 5천원이 투자된 양관(洋館) 이층 건물로서 1930년부터 개복동 시대를 열어갔다. 개복동은 일본인 거리의 외곽 즉, 조선인이 군거하는 구릉지 진입 지역으로서 일본인과 조선인 거주지 접점이면서 죽성동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군산 극장은 인근 조선인 초가집이 무질서하게 들어서 일명 ‘콩나물 고개’로 불린 조선인 빈민 지역을 배후로 영업을 시작했다. 군산 극장과 100여 m 이내의 거리에 1920년대 희소관이 개관하여 영업하고 있었다. 희소관은 일본인 중심 상권이 형성된 도심과 거리적으로 더욱 근접해 있었다.

[군산좌와 조선인 빈민 그리고 위생 문제]

군산은 일본인의 도심 거주와 조선인의 변두리 거주라는 종족 간 차별적인 도시구조 형성과 함께 도시화가 이뤄진 곳이다. 변두리로 밀려난 조선인은 구복동, 창성동, 둔율동 등지에서 토막민(土幕民)을 형성하였다. 이들 지역은 희소관군산 극장이 자리한 개복동 인근에 자리하였다. 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 대부분의 조선인 남성들은 일본인 소유 사업체나 부두 노동에, 조선인 여성은 일본인 가정 식모살이 또는 정미소 미선공(米選工) 등 단순 노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비록 저임금이지만 조선인들의 경제 활동과 그에 따른 수입(收入)은 그들 거주지와 인접한 극장으로 발길을 끌었다. 하지만 단순 노무직에 종사한 조선인들이 극장에서 지출할 수 있는 금액은 무척이나 제한적이었다. 1928년 군산좌의 조선인 영화 입장료가 무척이나 저렴하게 책정되었기 때문이다. 즉, 경성의 흥행사 임수호가 지방 순업(巡業)을 하면서 군산좌에서 활동 사진을 상영하였는데, 이때 입장료가 일반인 40전이었고 조선일보 구독자는 반액 할인 혜택을 받아 20전이었다. 주목할 점은 당시 입장료가 1920년대 후반 전북 평균 관람료 55전[소인 30전]보다 훨씬 저렴하다는 사실이다. 즉, 군산좌 입장료가 전북 평균보다 15전이나 저렴한 셈인데, 이는 그만큼 군산 조선인 관객의 경제적 빈곤을 반증하고 있다. 게다가 1927년 전북 활동사진 최고 관람료 대인 1원[소인 50전], 최저 관람료 대인 20전[소인 10전]인 사실을 보았을 때, 군산의 조선인 관객의 입장료는 최하에 속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군산좌 입장료는 희소관의 그것과도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1928년 희소관에서 기독교 계열 학교 주최로 음악 가극 대회(音樂歌劇大會)가 열렸는데, 이때 입장료가 특별권 1원, 보통권 50전, 학생권 30전이었다. 당시 공연은 교회 주일 학교에서 주최한 소년 소녀 가극(歌劇)이었다. 즉, 전문성을 결여한 가극 입장료가 상업 영화보다 높게 책정된 것이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석 가능하다. 군산좌는 당시까지 비상설관이어서 극장 등급이 낮았고, 건물 노쇠와 오염을 이유로 지역 사회로부터 자주 위생 상태를 지적받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이유야 어떻든, 종족별 구분이 명확한 개항도시 군산의 군산좌를 들락거렸던 조선인 관객은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속하고 있었던 점은 분명해 보인다.

1928년 군산좌에서 열린 임수호 순업 일행의 활동 사진 상영은 당대 군산 조선인 관객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조선 일보』에 실린 영화 상영을 알리는 선전 문구가 주목되기 때문이다. 임수호는 경성에서 대대적인 흥행을 올린 「아리랑」[나운규, 1926]의 흥행권을 사들여 지방 순업에 나선 인물이다. 그런데 조선 일보가 「아리랑」에 대한 특별한 언급 없이 ‘조선 명편(朝鮮名篇)’으로만 소개를 하고, 대신에 「멍텅구리」[이필우, 1926]상영을 강조한 것이다. 「멍텅구리」는 1924년부터 『조선 일보』에 연재된 조선 최초의 신문 만화 「멍텅구리 헛물 켜기」를 영화화 한 것으로, 『조선 일보』의 '멍텅구리' 부각과 강조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운규의 상징적 영화에 대한 선전 부재는 당대 군산좌 조선인 관객 취향의 미분화를 보여주었다.

한편, 1920년대 군산좌는 극장 위생 문제와 관련하여 건물 신축과 이전(移轉) 문제가 제기되었다. 군산은 한일 병합 이전 근대 도시로서 체계를 갖추었지만 1923년에 와서야 생활 하수 처리 공사가 착수될 정도로 위생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게다가 1929년 초 봄 전북 도내에 유행성 감기가 돌면서 2만여 명의 환자와 500여명의 사망자까지 발생했다. 군산은 환자 59명에 사망자 3명에 그쳤지만, 군산 인근 농업 미작 지대 옥구(沃溝) 지역은 환자 760명에 사망자 32명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수 사람들이 몰리는 극장의 위생 문제는 더욱 민감한 사안이었다.

건물 노후와 위생 문제로 신축 문제가 거론된 군산좌는 1926년 군산부 도심 일본인 거리 명치정(明治町)에서 극장을 새로 지을 목적으로 예산 5만원을 책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극장은 명치정이 아니라 조선인 거주지 초입 개복동에서 문을 다시 열었다. 1930년 개복동 군산 극장이라고 해서 위생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군산 극장이 조선인 빈민층 토막민 거주지와 색주가(色酒家)를 배후로 둔 사실 때문이었다. 유곽이 상기시키는 도덕적 불온성으로 인해, 군산 극장을 ‘불결한’ 장소로 바라보는 시선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극장의 사회적 불온성]

일제 강점기 지역 극장들이 불온(不穩)의 잠재적 배태 공간으로 인식된 것은 극장이 자리한 도시 환경에서 기인하였다. 희소관군산 극장이 자리한 개복동은 조선인 빈민 거주지뿐만 아니라 기생과 기생조합 권번(券番) 그리고 유곽이 자리한 곳이었다. 군산의 유곽 설치는 1906년 일본인 거류 민단과 관할 이사청(理事廳) 이사관이 직접 관여하여 설치할 정도로 식민 지배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였다.

군산의 유곽은 신흥동과 야마테마치[山手町] 두 곳이었다. 신흥동 유곽은 6개의 업소에 약 60명이 일하고 있었고, 야먀테마치 유곽도 신흥동과 비슷한 규모인 것으로 기록된다. 개복동에 야마테마치 유곽이 자리했는데, 개복동은 일본인 유곽뿐만 아니라 조선인 기생집과 막걸리를 파는 선술집 형태의 ‘은근짜’ 마을 역시 형성되어 있었다. 유곽 영업과 불가분 관계를 형성한 권번은 군산 권번과 소화 권번(昭和券番) 두 곳이었다. 소화 권번은 일제 강점기 경성 이외 지역에 존재한 조선 기생 권번 총 23곳 가운데 하나로서, 군산 동영정에 위치한 것으로 기록된다. 동영정은 영정(榮町) 즉, 조선인들이 ‘송방 거리’로 불렀던 조선인 거리 죽성동 일대를 의미한다. 1935년 소화 권번에 조선인 기생 30명이 속해 있었고 조선인 창기(娼妓) 숫자는 26명에 달한 것으로 보고된다.

유곽이 지역 극장과 장소적 동질성의 맥락에서 특별히 이해되는 이유는 군산이 대량의 청·장년층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항구 도시라는 사실 때문이다. 군산은 1909년 이전 이미 조계(租界) 내에 남성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항만 관련 업무 및 창고업과 정미업이 발달한 한편으로, 조계 밖은 여성 노동력을 요구하는 유곽과 서비스업이 발달하였다. 군산의 부두 노동 종사 조선인 남성 비율이 높은 것과 비례하여 유흥업 종사 여성 노동력 비율 역시 높았다. 1910년대 군산에서 직업을 갖고 있는 여성 10명 가운데 6명 이상은 유흥업 종사자였다.

군산의 유흥업은 1930년대 세계 공황으로 조선인 토막민들이 하루 끼니도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번창하였다. 카페 숫자는 이전보다 세 배나 늘어났고 유곽도 호경기를 누렸다. 유곽의 번창은 1933년 1개 권번의 월 평균 수입이 1,000원에 달한 것에서 확인된다. 1개 권번의 일일 평균 수입이 33원인 셈인데, 이 액수는 30년대 중후반 경성의 백화점 점원인 ‘숍걸’의 월급 30원보다 많은 액수였다. 군산 일본인 유곽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신흥동 칠복루(七福樓)는 1920년대 후반에 이미 하루 최소 120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군산의 조선인 사회가 전체적으로 빈곤한 가운데 유곽이 호황을 누린 것은 기형적 경제 구조와 그로 인한 사회 불안을 의미했다. 유곽은 언제나 사회적 범죄가 발생하는 잠재적 불온 공간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실제로, 군산의 유곽에서는 예기치 않은 사건 사고와 부정(不正)이 벌어졌다. 군산의 최고 일본인 유곽인 칠복루에서 현금 강도 사건과 조선인 유곽 명월루(明月樓)에서 치정(癡情)에 얽힌 상해 사건과 유곽을 찾은 손님의 원인 모를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 유곽은 타지에서 부정을 저지르고 은닉하며 향락을 즐기기에도 적당한 공간이었다. 따라서 유곽은 인근의 조선인 빈민 지역과 극장에 대한 검속과 함께 일제 지배 권력의 항상적인 감독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군산 지역 유곽 발달과 유곽 종사자들의 소득은 식민지하 근대적 주체로서 기생의 위상(位相) 변화를 가져왔다. 신분 질서 해체를 동반한 근대화 과정과 일제의 수탈 구조에서 잉여 경제 활동에 참여한 기생은 기존의 조선인 여성에게 부여한 여성상에서 이탈한 존재였다. 기생은 소비 능력 구비와 사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지역 극장 관객층을 구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희소관 - 식민지 문화 정치 실현 장소]

개항 이래 군산의 조선인 인구는 지속적으로 늘어났는데, 1927년에 이르러 조선인 인구는 일본인의 2배에 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역에서 차지하는 조선인 인구에 비하여 조선인의 경제 활동은 무척이나 미미하였다. 그만큼 조선인 가계 사정도 좋지 않았다. 근대 도시 군산은 일본 식민 제국으로 물자 수탈을 위해 기획되었기에, 조선인이 사업가로 성장하거나 경제 활동의 주축이 되기에 너무나도 취약한 구조였다. 극장을 소유하거나 운영하는 일 역시 조선인의 몫이 아니었다. 1920년대 초반 개관한 것으로 추정되는 희소관은 1927년 10월 1일 현재 일본인 가와카미[河上好蔵] 경영의 2층 건물로서 관객 700명 정원을 수용하였다. 개관 이래 줄곧 일본인 소유의 군산좌 역시 1926년 현재 관주(館主)는 일본인 도전(島田) 이었다. 1932년 ‘조선 상설관'으로 전환한 군산 극장의 주인 역시 송미인평(松尾仁平)이었다.

일제 강점기 군산의 극장은 종족[ethnic] 공간이었다. 즉, 극장은 제국과 식민 대중의 지배와 저항의 문화 실천이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희소관군산좌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일본인을 주요 대상으로 삼아 영화를 상영하였다. 1925년 7월 희소관에서 발생한 상해(傷害) 사건의 가해자가 일본인 ‘해설자’[변사]이고 피해자는 조선인 악사(樂士) 조남월(趙南月)이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일본어 사용 변사 연행은 조선인 관객의 희소관 출입을 제한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희소관이 절대적으로 일본인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어 이해가 필요치 않은 공연도 무대에 올라 조선인 입장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즉, 1928년 희소관에서 군산 기독교 계열 학교 영신 여학원과 구암 유치원(龜岩幼稚園) 주최 음악 가극 대회(音樂歌劇大會)가 열렸다. 영신 여학원은 1920년대 지역 사회 운동을 이끌던 영신 학원 설립 야학(夜學)이었고, 구암 유치원은 조선인 아동 교육 기관으로서 모두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가 세운 구암 교회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음악가극 대회는 수익 창출이 아니라 학교 기금 마련이 목적이었다. 일본인 극장에서 개최된 조선인 행사는 ‘민족’이 아닌 ‘교회 공동체’ 호명에 의해 가능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희소관의 조선인 대상 행사에 동원된 관객의 범주는 제한적이었다. 행사가 서구 문화에 상대적으로 익숙한 식자층(識者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다. 희소관에서 열린 행사는 군산 연예회(群山硏藝會) 현상(懸賞) 전국 규모의 ‘신구 독창 대회(新舊獨唱大會)’와 군산 부인 교육회 주최 성악가 차재일(車載鎰)의 독창회였다. 차재일의 군산 독창회는 이보다 2년 앞서 경성에서 열렸던 것으로, 희소관은 근대 개화의 중심 경성에서 열린 행사를 지역에서 재연(再演)하면서 경성의 문화를 전파하고 조선인을 교육하는 장소가 되었다.

1920년대 드물게나마 희소관에서 열린 조선인 대상 행사는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1930년대 중반 중일 전쟁 발발 이전 한 차례 등장하였다. 1936년 『조선 일보』, 『매일 신보』, 『동아 일보』 등 4개 언론사 군산 지국이 주최하여 테너(tenor) 김훈의 독창회를 개최한 것이다. 김훈은 일본과 유럽에서 성악을 공부한 자로서, 각 언론사들은 그가 조선을 포함하여 만주와 중국까지 순회 공연을 계획 중이라며 선전했다. ‘군산부 귀암리’ 출신이 강조된 김훈의 독창회는 1931년 만주 사건 이후 대륙 진출에 앞서 ‘대동아 공영’을 조장한 일본 제국의 문화 정치 일환이었다. 군산 ‘출신’의 ‘세계적 가수’라는 강조는 이후 전개될 전시 동원 체제에 지역민을 동원하기 위한 선전 문구였다.

[군산좌, 군산 극장 - 식민지 조선인 문화 운동과 공론장(公論場)]

군산좌는 개관 초반 일본 가부키[歌舞] 공연을 중심으로 하면서 활동 사진과 신파극(新派劇) 및 국극(國劇) 그리고 창극(唱劇)을 교대로 무대에 올린 다기능 공연장이었다. 무엇보다도, 군산좌는 조선인 중심 상권과 생활 무대를 형성한 죽성동에 위치한 까닭에 군산좌 프로그램은 조선인 계몽과 교육 그리고 오락 제공을 위해 구성되었다. 1922년 이기세 일행의 신파극과 1925년 취성좌(聚星座) 김소랑의 군산 공연이 이뤄졌고, 토월회는 군산좌에서 공연을 가졌다. 토월회 공연은 신문에 예제(藝題)까지 소개되었으며, 3일 동안 10여개에 이르는 신작을 무대에 올렸다. 군산을 찾은 공연 단체는 지역민으로부터 대단한 호응을 얻었는데, 그 이유는 공연 단체가 그들 수익의 일부를 지역 사회에 기부했기 때문이다. 이기세 일행이 군산 조선인 유아 교육을 위해 흥행 수익의 대부분을 기부하고, 김소랑 일행이 수익금의 일부를 군산 도시 빈민을 위해 기부하였다. 그래서인지 1928년 토월회가 군산좌에 들러 재공연을 했을 때 공연 기간이 이전보다 5일이나 늘어났다. 무용가 배구자(裵龜子) 공연 역시 1920년대 군산좌 프로그램을 차지했다. 배구자의 군산 공연은 『동아 일보』, 『조선 일보』, 『중외 일보』 군산 지국과 지역 일간지 『군산 일보』까지 합세하여 후원할 정도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1920년대 군산좌는 당대 조선인 개인과 집단의 다양한 욕망의 표출 공간이었다. 군산좌는 특정 약방(藥房)에서 약을 구매한 조선인에게 외화 상영 무료 입장을 허용하는 판촉 장소로 이용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주로 조선인을 계몽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즉, 1922년 군산 출신 동경 재학생 모임 친목 금우회(親睦錦友會)가 문화 선전을 표방하며 군산좌에서 소인극(素人劇)을 연출했다. 문화 운동 차원에서 벌어진 공연이었지만 동경 조선인 고학(苦學) 유학생 기숙사 건축 기금 마련 역시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1923년 군산 청년회가 창립 취지 선전과 지역민 대중의 이해를 구하고자 군산좌에서 영화를 상영하였다. 즉,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각 지역 청년회는 서로 다른 지역을 오가며 순회 영사 활동을 펼쳤다. 계몽을 목적으로 군산을 다녀간 청년 단체는 경남 통영에서부터 전남과 광주 등지였고, 군산의 청년 단체는 충청도와 대구 경북 지역까지 아우르며 활동 사진을 포함한 순회 연예 활동을 펼쳤다. 군산좌가 조선인 교육장으로 이용되는 일은 1930년대 초반까지 드물게 지속되었다. 1930년대 군산의 ‘유일한 수양 기관이자 교양 기관’으로 소개된 백조회가 군산 극장에서 무대 공연을 기획하였고, 1931년 조선인 어린이 대상 사립 교육기관 영신 유치원은 군산 극장에서 음악 대회를 열었다.

1930년대까지 군산좌/군산 극장은 식민 권력의 문화 정치 전략에 부응 또는 경합하면서 조선인 공론장(公論場)으로 기능하였다. 일제 강점기 피식민 조선인 대중은 자신들의 의견을 결집시킬 공간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다. 군산과 같이 종족 간 거주지 분할이 명확하고 종족 간 정치·경제적 위계가 뚜렷한 지역에서 그것은 더욱 절실하였다. 따라서 조선인 상업 중심지 죽성동 군산좌와 조선인 빈민 거주지 군산 극장은 조선인 의견 결집과 의제를 조직화하는 공론장으로 기능할 수밖에 없었다. 1926년 군산 부민 대회(群山府民大會)가 개최되었을 때, 대회를 앞두고 구복동에 모인 조선인 15명은 조선인 학교 증설과 도(道) 평의원 선출 문제부터 도로 개선, 하수(下水) 처리와 공동 변소 및 공동 묘지 증설 등 조선인 위생과 편의를 증진시키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들 문제는 동년 8월 8일 군산좌에서 열린 군산 부민 대회에서 의제로 상정되었다. 1928년 군산좌에서 운송 합동(運送合同)반대 시민 대회’가 열렸으며, 1930년 군산 극장에서 조선인 교육 기관 군산 제2 보통학교 기부금 문제와 기성 위원 책임 문제를 다룬 군산 시민 대회가 열렸다.

조선인 결집 장소로서 군산좌, 군산 극장의 기능은 일제 강점기에는 이들 극장을 사상적으로 불온한 공간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이들 극장에서 벌어진 집회 성격뿐만 아니라 집회 주도 인물들의 정치적 성향에서도 기인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1926년 군산좌에서 열린 군산 부민 대회 준비 회의 사회(司會)를 맡은 차주상(車周相)의 이력을 들 수 있다. 차주상은 1923년 동아 일보 군산 지국 총무로 재직한 자로서,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기록된다. 1929년 4월 4일 『중외 일보』가 경기 경찰부 중대 사건으로 전북을 중심으로 조직된 공산주의 비밀 결사 활동 인물 검거를 발표하였는데, 총 24명의 피검자 가운데 차주상의 이름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조선인 대중 결집과 공론 형성의 종족 공간 군산좌/군산 극장은 적어도 식민 통치를 불편하게 만드는 잠재적 장소였다. 따라서 식민 제국 감시의 시선은 극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는데, 극장 인근 송방 골목에 자리한 군산 경찰서의 존재가 이를 증거한다.

[1930년대 군산 극장의 ‘조선 상설관’ 전환과 조선인 극장 경험]

군산 극장은 1932년 조선 상설관(朝鮮常設官)으로 전환되었다. 종족 간 접점(接點) 지역이자 조선인 빈민 거주지 초입에 위치한 군산 극장의 조선 상설관 전환은 공론장을 필요로 하던 조선인들에게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조선’을 전면에 내세운 군산 극장의 변화는 동시기 영화 산업의 이해와 군산의 식민 도시화 심화가 가져온 결과였다. 군산 극장의 조선 상설관 전환은 1920년대 후반 외화 전문 배급사 기신 양행의 등장으로 대표되는 영화 산업의 변화와 1930년대 군산의 조선인 인구 증가 및 조선인 문화 소비 시장 변화에서 기인하였다. 즉, 1932년 10월 1일 군산부(群山府) 구역 확장과 그로 인해 늘어난 조선인은 잠재적 영화 관객 풀(pool)을 형성하였다. 게다가 1930년대 군산 지역민의 문화 향유 및 취향의 다양화 역시 조선 상설관 전환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1930년대 중반 경성의 미나카이[三中井]백화점 군산 지점이 명치통[현 중앙로 1가]에 문을 열었으며, 조선인 거리 송방 골목에 조선인에 의해 동아 백화점이 등장했다. 특히, 조선인 문화 시장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나타냈다. 1932년 군산 지역 동호인(同好人)들이 극예술을 연구하고자 창작 무대를 조직하고 군산 극장에서 이틀간 회동한 일이 있었는데, 이는 이들 활동이 극장 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상시적인 자원으로 동원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또한 동년 조선어로 쓰인 『군산 춘추(群山春秋)』가 발간되는 등 조선인 문화 향유 계층이 가시화되면서 취향의 분화 역시 전개되고 있었다.

하지만 군산 극장의 조선 상설관은 겸영(兼營)방식이었다. 군산 극장은 조선인 관객 입장만으로 원활히 운영할 수 없었다. 1929년 군산의 미곡(米穀) 이출은 여타 개항장 인천 및 부산 등지와 비교하여 최고조에 달하면서 조선인 빈곤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1932년 군산 조선인 수는 전년보다 200명이 늘어나 인구 수 16,900명에 가구 3,286호에 이르렀지만, 조선인 공과호(公課戶) 숫자는 600호 감소하였다. 조선인의 토지 소유 면적은 일본인 그것의 10분의 2에 그쳤고 토지 가격은 20분의 1에 불과했다. 게다가 인근 농촌 유민들의 군산 시내 유입과 부랑(浮浪) 그리고 때마침 여름철 가뭄과 식수난으로 인해 조선인의 경제적 빈곤은 절대적인 상황에 이르렀다. 조선인 가계(家計)의 곤란은 1930년대 중반까지도 계속되었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조선인 가정 아동조차도 영양 부족과 위생 문제에 노출되어 있었다. 조선인이 군산 극장을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극히 일부에 국한된 일이었다. 절대 다수의 조선인에게 극장 영화 관람은 여전히 일상 밖의 일이었다. 따라서 군산 극장의 조선 상설관 명명은 수사(修辭)에 불과하였다. 1930년대 초반 호명된 조선 상설관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의미를 상실하였으며, 1930년대 후반 조선 사회가 전시 동원 체제로 돌입하면서 더욱 쇠퇴해갔다.

[해방 이후부터 2013년 현재 군산의 극장]

해방을 맞이하자 일본인 주인이 떠나간 군산 극장희소관은 적산(敵産)관리국에게 넘어갔다가 한국인에게 불하(拂下)되었다. 군산 극장은 한국인 주인 김봉희, 김원전, 육복술, 상이 군인회, 그리고 백정흠 등을 차례로 거친 이후 1966년부터 박주일에 의해 운영되었다. 군산 극장은 1990년대 후반 씨네마 우일로 개명하였으며, 2000년대 후반 폐관되었다. 해방 이후, 희소관 책임자는 일제 강점기 극장 직원이자 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백남준이었다. 하지만 백남준이 필름을 제대로 배급받지 못하여 극장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극장 주인은 김삼만으로 바뀌었다. 김삼만은 전주시 경원동 옛 전주 시청 앞의 백도 극장, 익산시[구 이리시]의 이리 극장과 삼남 극장을 소유 또는 관리 운영한 사람이었다. 김삼만에 의해 접수된 희소관은 남도 극장으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1971년 남도 극장의 새 주인 박주일이 건물을 전면 증개축하면서 국도 극장으로 개명하였다. 국도 극장 역시 2000년대 중반까지 운영되었으나 2014년 현재 폐관된 상태이다.

해방 이후, 군산의 극장 문화를 변화시킨 것은 6·25 전쟁이었다. 휴전을 맞은 1950년대 중후반 죽성동에 창고를 개조한 문화 극장이 문을 열었다. 문화 극장은 가설극장으로서 극장 건물 외부에 ‘문화 극장’이라는 명칭이 아니라 ‘가설 극장’이라는 이름을 걸고 영업했다. 군대 후생(厚生) 사업 일환으로 시작된 문화 극장 영화 상영은 한국 영화는 물론 할리우드 영화도 포함하였다. 할리우드 영화는 정상적인 배급 경로를 거치지 않고 인근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16㎜ 필름이었다. 군부대를 거쳐 나온 필름은 사운드(sound) 증폭 문제를 갖고 있거나 자막이 없는 것들이어서 변사(辯士)를 필요로 했다. 변사는 당연히 마정봉이었다. 문화 극장은 여타 극장에 비하여 입장 요금이 저렴하여 10대의 어린 중학생부터 일제 강점기 설립된 만월 고무공장 노동자들까지 다양한 연령과 계층을 아울렀다. 문화 극장의 객석은 개별 좌석이 아니라 벤치(bench)식으로 대략 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군산시는 물론 인근의 지역민까지도 찾았던 문화 극장은 여타 극장에서 35㎜ 필름 상영이 보편화되는 한편으로 1963년 장미동에서 제일 극장이 신축 개관하자 문을 닫았다.

현재 산업 은행 군산 지점 자리에 관람석 876석을 갖춘 제일 극장 등장은 군산 지역 극장 흥행 판도에 변화를 가져왔다. 제일 극장이 문을 열자 이전까지 군산 극장과 남도 극장에서 영화를 즐기던 관객은 제일 극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제일 극장은 최신의 시설뿐만 아니라 관객석도 지역 극장 가운데 가장 많았다. 1980년 현재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군산 극장 615석과 국도 극장 787석에 비하여 제일 극장은 876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영화 상영에 있어서 여타 극장들보다 나은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필름 배급사 역시 제일 극장에 흥행 작품을 우선 배급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호서(湖西) 지역에서 변사로서 명성이 자자한 마정봉이 문화 극장 폐관 이후 제일 극장으로 옮겨와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군산 지역에 새롭게 등장한 극장은 제일 극장 이외에 대양 극장이 있었다. 1967년 미원동 924번지에서 관객석 392석 규모로 문을 연 대양 극장은 재상영관이었다.

한편,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지역 극장 문화 역시 바뀌어갔다. 1950년대 군산 극장 프로그램을 차지한 것은 영화 이외에, 순극(純劇)과 창극(唱劇) 그리고 여성 국극(女性國劇) 공연이었다. 한 달에 평균 두세 번 정도 열렸던 이들 무대 공연은 1960년대까지도 군산시를 거쳐 익산시와 전주시를 순회했다. 군산 극장에 들린 대표적인 창극단은 ‘임춘앵과 그 일행’으로, 임춘앵의 창극단 공연이 열리는 날이면 트럭을 동원하여 피리를 불고 징을 치면서 ‘마찌마와리’ 선전을 하였다. 전옥이 출연한 악극단이 군산 극장에서 공연을 갖게 되면, ‘눈물의 여왕 전옥 특별 출연’이라는 글씨가 극장 간판을 차지했다. 전옥의 악극 「항구의 일야」는 30여 분 정도의 공연과 ‘바라이디 쇼(variety show)’로 불린 노래와 만담(漫談), 그리고 2부 공연으로 구성된 총 2시간짜리 공연이었다.

1960년대 한국 영화 전성기를 거친 이후, 1970년대 들어 TV 매체의 대중적 보급은 지역 극장 운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영화 상영을 통한 극장 영업 수익이 줄어들자 극장 무대는 가수들의 ‘쇼(show)' 공연으로 채워졌다. 군산 극장 보다 시설이 좋은 국도 극장과 제일 극장에서 한 달에 한두 번 가수들의 쇼 공연이 열렸다. 국도 극장에서 1970년대 당대 최고의 가수 남진과 나훈아의 쇼(show)가 열렸고, 입장객 최고치를 기록한 ‘김추자 쇼’는 하루 2~3회 공연에 밀려드는 손님들로 극장 문이 부서졌다.

지역 극장들은 1980년대까지도 그런대로 극장을 운영할 수 있었지만, 1990년대 IMF 실시와 함께 절대적인 운영난을 겪게 되었다. 군산시 인구 숫자도 줄어 1980년경 30만이었던 인구는 2006년 현재 기준 22만 명으로 감소했다. 게다가 군산시는 전라북도 행정 도시 전주시와 자동차로 30분 이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여서, 군산 지역민이 전주시에서 영화 관람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까지도 영화를 상영한 씨네마 우일[군산 극장 후신]과 국도 극장은 2013년 현재 문을 닫았다. 대신에, 나운동에 독점 대기업이 운영하는 군산 롯데 시네마와 군산 CGV가 운영 중이다. 975석을 갖춘 군산 롯데 시네마는 2006년 지역 최초로 멀티플렉스(multiplex)로 등장하였고, 군산 CGV은 7개관에 1,100석을 보유하고 있다.

참고로, 군산 지역 극장 역사를 논할 때 빠져서는 안 될 사람이 박주일이다. 박주일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군산시 극장 사업을 도맡은 인물이다. 박주일은 군산 극장과 국도 극장 그리고 제일 극장과 대양 극장 모두 4개의 지역 극장 가운데 3개의 극장을 소유 또는 임대 경영하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 군산 극장, 1970년대부터 국도 극장을 임대 또는 인수 경영, 그리고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제일 극장을 임대하여 영화를 상영하였다. 박주일이 지역 극장 운영 대표를 자부(自負)하고 나선 것은 극장과 필름 배급사와의 갈등에서 기인했다. 지역 극장 운영을 통합하자 필름 배급사와의 협상 관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주일은 흥행성 높은 작품을 먼저 배급받기 위해 경쟁적으로 전도금(前渡金)을 지급하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다수의 극장을 통합 운영한 것은 서울을 비롯한 여타 지역 도시에 비해 시장성이 크지 않은 군산의 극장 수익을 위해 취해진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역민에 의해 운영되는 지역 극장은 사라져갔다. 박주일이 흥행사 또는 문화 사업가 등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상관없이,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40여 년의 시간을 지역에서 극장과 함께한 그의 삶은 영화와 함께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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