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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1570
한자 改新敎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윤광석

[정의]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활동 중인 그리스도교 분파.

[개설]

한국이 개신교를 접하게 된 연대는 선교의 목적으로 입국하기 전인 162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에 왔던 최초의 개신교 신자는 1627년에 온 벨테브레(Jane Janes Weltvree)와 1653년에 온 하멜(Hendrich Hamel)이었다. 한국에 선교 목적으로 입국한 최초의 선교사는 독일 포메라니아 출신의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였다. 그는 1832년 7월 17일 황해도 조나진[지금의 몽금포]에 정박하여 해당 지역 지방관에게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당시 충청도 서해안인 홍주(洪州), 원산도(元山島)[지금의 보령시]에 정박하여 8월 12일 떠날때 까지 원산도에서 전도 활동을 하였다.

[호남 지역의 선교]

한국의 초기 선교를 주도한 곳은 알렌·언더우드로 대표되는 미국 북장로교와 아펜젤러·스크랜튼으로 대표되는 미국 감리교였다. 이후 호남 선교를 책임진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가 이루어진 것은 언더우드 선교사와 미국으로 건너가 밴더빌트 대학(Vanderbilt U.)과 에모리 대학(Emory U.)에서 유학한 윤치호 덕분이었다.

북장로교의 선교사였던 언더우드는 안식년이 되어 미국에 돌아가서 1891년 9월에 시카고에 있는 맥코믹(McCormick) 신학교에서 조선의 영혼들이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간절히 호소했고 이때 당시 신학교 학생이었던 테이트(L. B. Tate)[최의덕(崔義德)]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해 10월에는 테네시 주 내쉬빌(Nashiville)에서 열린 미국 신학생 연합 외국 선교회에서 언더우드와 한국 유학생 윤치호(尹致昊)가 또 다시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이때 이 모임에 참석했던 맥코믹 신학교 학생인 테이트, 유니온 신학교(Richmond) 학생인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이눌서(李訥瑞)]와 전킨(William McCleery Junckin)[전위겸(全緯廉)]이 한국 선교에 몸 바칠 것을 결심하고 남장로교 외지 선교회에 선교사 지원서를 내지만 남장로교는 재정 문제로 이를 거절한다. 그러나 선교사로 자원한 이들이 계속 조선 선교를 위한 뜨거운 기도회를 갖고 언더우드를 주강사로 각지를 순회하면서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또 언더우드의 형 존 언더우드가 2만 5천불, 언더우드 자신도 3천불을 헌금하니 남장로교는 드디어 한국 선교에 착수한다.

미국 남장로교는 1892년 1월 테이트와 테이트의 동생인 매티 테이트(Miss Mattie Tate)[최마태], 전킨전킨의 부인 리번(Mary Leyburn), 레이놀즈와 레이놀즈의 부인 볼링(Patsy Bolling) 데이비스(Miss Linnie Davis) 등 7명을 초대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역사는 이들을 '7인의 선발대(Seven Pioneers)'라고 부른다. 이들 중 데이비스는 1892년 10월 18일 제물포에 도착했고, 나머지 6인도 11월 3일에 제물포에 도착함으로써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가 시작되었다. 이들이 이후 10개월 동안 한국 생활에 적응 훈련을 하고 언어를 습득하는 동안 1893년 1월 28일 미국 북장로회 소속 의료 선교사인 빈톤(DR C.C Vinton)[1891년 내한, 1908년 이한]의 서울 집에서 장로교파 선교사들이 모여 ‘장로회 미슌공의회’를 조직하였다.

조선야소교서회에는 “1893년에 장로회 정치를 쓰는 미션 공회라 칭하난 회를 조직 하얏노니 차회난 경성 빈톤의 가에서 조직하얏난디 설립자는 남장로회 미션 회원 목사 이눌서, 전위렴, 최의덕, 장씨,.... 제씨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눌서는 레이놀즈, 전위렴전킨, 최의덕은 데이트 선교사의 한국 이름이다. 레이놀즈 목사는 이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어 회무를 처리하였는데 여기서 장차 한국 장로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칠 두 개의 안건이 채택되었다. 네비우스 방법을 선교 정책으로 공식 채택하고, 그리고 예양 협정(禮讓協定, Commity Agreements)을 맺어 선교의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였다. 단 인구 5천명이 넘는 개항장이나 도시는 공동으로 선교할 수 있고, 5천명 미만 되는 지역은 한 선교부에서 점유하도록 하였다.

이 원칙하에 군산 지역의 선교는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담당하게 되었고, 1894년 3월 30일, 레이놀즈(William Dais Reynolds)[1867~1951.4.2, 한국명 이눌서] 선교사와 드류(A. Damer Drew)[한국명 유대모] 의료 선교사 일행이 군산으로 오게 되었다. 이것이 군산 개신교 역사의 시작이다.

[군산 지역의 초기 개신교]

1895년 3월 서울에서 조선어를 익히고 조선인의 문화와 생활을 체험한 전위렴 선교사 부부와 유대모 의료 선교사는 4명의 선원들을 태운 목조선을 전세 내어 제물포를 출발하였다. 보통 4일 걸릴 바다 길이지만 비와 안개로 인해 11일 만에 겨우 금강 하구 곧 서구인들이 말하는 베실만(Basl's Bay)이 위치한 군산에 도착하였다. 1899년에야 개항하게 될 군산은 아직은 백 여 호의 초가집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어촌으로 구불구불하고 더러웠다. 두 선교사는 선창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예배 처소와 진료소로 사용하기 위해 당시 군산 진영이 있던 수덕산 기슭[당시 구영리, 현재 영화동 항운노조 인근]에 있는 초가집 두 채를 당시 환율시세로 상당히 비싼 50달러에 구입하였다.

유대모의 집은 1917년 당시의 우체국의 바로 앞에 있는 언덕의 기슭에 있었고 전위렴의 집은 유대모의 집에서 남동쪽으로 근접한 거리에 있었다. 전위렴이 설교하면 유대모는 환자들을 돌보고 사람들은 진료도 받고 말씀도 들으려고 매일 같이 그들의 집을 찾아 왔다. 그들은 1개월간 머물러 현지 사정을 살핀 후 가족들을 데려오기 위해 서울로 갔다. 하지만 당시 시국 상황이 동학 혁명과 청일 전쟁 이후에 민심이 흉흉하여 차일피일 미루다가 다음 해 1896년 4월 5일 안전하게 군산에 도착하였다. 이로서 군산진 교회[또는 군창 교회, 이후 군산 교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전위렴 선교사는 정인택 조사의 도움으로 매 주일 오후 세 사람에게 세례 예비 교육을 시킨 다음 마침내 1896년 7월 20일 세례식을 거행하니 이들은 호남에서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되었다. 이 날에 호남 지역 최초로 성찬 예식이 거행되었다. 10월 4일에는 송영도의 딸 송성장이 유아 세례를 받았는데 이 또한 호남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군산 교회가 설립되어 갔다.

19세기 말 조선은 열방의 외세 앞에 마치 풍전등화인양 그 사직의 명맥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특히 일본의 야욕은 노골적으로 나타났으며 군산은 바로 저들의 코앞에 진상처럼 놓아져 있었다. 많은 인사들의 반대에도 일본의 계속적인 요구에 따라 고종은 1895년 5월 1일 군산을 개항하도록 허락하니, 요구하던 조차지는 아니지만 일본 정부는 대륙을 향한 병참 기지로 그리고 드넓은 호남 평야에서 산출되는 쌀을 자국으로 보내기 위한 미항(米港)으로 이용하기 위해 일본인들을 본격적으로 군산으로 이주시켰다. 따라서 항구 인근은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개항 전 20여 호 77명이었던 일본인이 1900년에 131호 422명, 1910년에는 957호 3,649명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미명 하에 일본 목포 영사관 군산 분관을 설치하고 자국민을 관리하였다.

이처럼 일본의 거류민들이 군산 땅에 자리잡으며 선교 본부로 삼고 있는 초가 인근까지 점유해 들어오자 전위렴과 유대모 선교사는 더 이상 이곳에서 군산의 조선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여겨 새로운 선교부를 물색하는 가운데 선박 선교 여행에 편리한 당시 옥구군 임피면 구암리[궁멀]로 선교부를 옮기었다.

주명준[전주 대학교 교육대학원장 역임]은 선교부가 궁멀로 옮겨간 1899년 12월 21일자로 군산 교회는 소멸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개복 교회 김종석 목사에 의하면 1899년 궁멀로 군산 선교부가 옮겨진 것은 선교부가 옮겨진 것이지 교회가 옮겨진 것이 아니요, 남아 있는 교인들에 의해 군산 교회는 존속되었다고 주장한다. 1904년판 예수교 장로회 연감에서는 궁멀 교회의 창립을 12월 21일[장로회 사기에는 1900년]로 못 박으면서 개복동 교회 창립 년에 대해서는 미상이라고 하였다.

1928년 간행된 『조선 예수교 장로회 사기』[이하 사기라 함]에 보면 이러한 기록이 있다.

“1899년 沃構郡 九岩里 敎會가 設立하다 先是에 宣敎師 全緯廉 醫師 柳大模 傳道人 張仁澤이 當地에 來往하야 熱心 傳道함으로 信者가 漸起하야 禮拜堂을 新築하고 其後에 吳仁默을 長老로 장립하야 堂會를 組織하였다. 牧師 金弼秀 宣敎師 夫緯廉 長老 梁應七 朴淵世 高石柱 劉載南 李昌柱 助師 李守鉉 等이 上繼 始務하니라.”

또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1905년 群山府 開福洞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宣敎師 全緯廉과 醫師 柳大模가 本處에 住宅을 定하고 福音으로 宣傳하며 醫藥으로 施濟하야 信者를 得함으로 全緯廉 私邸에서 集會하난 中 金蓬來 宋永道 二人이 湖南에 最先 受洗者가 되니라. 其後에 宣敎師 스텐슨會[필자주:호남선교부] 位置를 沃構 九岩으로 移轉케 됨으로 若干의 信徒는 九岩으로 來往하며 禮拜하고 惑은 他處로 移去하니라. 其後에 宣敎師 魚亞力[필자주:1873-1941. 1907년 부임해 온 A.M Earle]이 助師 崔興瑞로 群山에 傳道케 함으로 信者를 얻어 九福洞에 處所를 設立하고 會集하는 中 崔興瑞는 全圖 買書가 되어 專務하얏고 開福洞 南便山에 十二 間 禮拜堂을 新築하고 數十 信者가 禮拜함으로 교회가 完成되야 漸次 發展되난 중 裵京元, 洪鐘翊, 李春善, 梁錫柱, 李鎬成, 南弼, 金明後, 金斗鉉, 陳雲玉, 洪仁元 등이 熱誠 協同하야 多大한 效果를 있었고 陳雲玉이 助師로 始務하니라.”

위의 글에서 짐작해 보며 선교부가 궁멀로 옮겨 감으로 일부 교인들은 궁멀로 따라 갔고 일부는 흩어졌으며 일부는 군산에 그대로 남아 있어 최홍서 조사와 홍종익 등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던 중 교인들이 증가하자 1904년 3월 30일 군산시 구복동 77번지[현재 창성동]에 예배당을 건립하였고, 1906년 현재의 개복 교회 자리인 개복동 13-1번지로 이전하였다.

전라 노회록에 의하면 개복 교회를 1911년[제1회]부터 1915년까지는 군산 교회로 부르다가 그 후에 군산 개복동 교회로 지칭하였다. 이처럼 여러 기록에 의하면 개복 교회구암 교회와 달리 노회적으로 군산 교회로 부르고 있었으며 궁멀 교회는 임피 구암교회, 옥구 구암 교회라 부르고 두 교회를 함께 지칭할 때에는 ‘군산 구암 량교회’라 불렀던 것이다.

본래 군산항 인근 언덕 전위렴 선교사의 초가집에서 출발한 군산 교회가 사정에 따라 선교부가 궁멀로 이전하므로 인해 궁멀 교회에서 교회가 이어갔으며, 한편 따라가지 못한 교인들은 그대로 남아 여기저기 집으로 돌아가며 예배를 드리다가 개복동 교회를 세웠던 것이니 두 교회는 한 뿌리에서 동시에 뻗어 나온 두 가지이며, 한 원류에서 흐른 두 물줄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군산 지역의 초기 선교사들]

군산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며 환자들을 치료하고 또 학교를 세우는 등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 사랑의 수고와 생명까지 바친 군산 선교 초기 선교사들이 있었다.

1894년~1910년 군산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에는 레이놀즈 선교사, 전킨 선교사 부부, 드류 선교사 부부, 데이비스 여선교사, 헤리슨 선교사, 불 선교사 부부, 알렉산더 의료선교사, 이얼 선교사 부부, 케슬러 간호선교사, 버크랜드 선교사, 디사트 선교사, 피숴 선교사, 번네불 부부선교사, 페터슨 선교사 부부, 베딩거 선교사, 폰테인 선교사 등이 있다.

1910년 이후 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은 두퓨 선교사, 래드로프 간호 선교사, 멕쿠젠 선교사 부부, 그리어 선교사, 린톤 선교사 부부, 파커 선교사, 쉐핑 의료 선교사, 브렌드 부부 선교사, 홀리스터 부부 선교사, 우두스 간호 선교사, 탈메지 부부 선교사, 윌슨 부부 선교사가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군산에 찾아와 교회, 병원, 학교에서 봉사하였으며, 성경 교육, 부녀자 교육, 한글 공부, 농어촌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새 교육과 군산의 교회들]

1902년부터 전위렴 선교사는 그의 서재에서 소년들을 교육하기 시작하여 영명 학교라 하였고, 전위렴의 부인은 안방에서 소녀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멜볼딘 여학교라 하였다. ‘멜볼딘’이라 함은 버지니아주 렉싱톤 장로 교회의 부인들이 부위렴 선교사 부인의 소식을 듣고 교사 신축 기금을 모아 보내왔는데 이들 부인들이 멜볼딘 학교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군산 영명 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활동하면서 전위렴 선교사는 미국 교회에 교사 신축과 교육 선교사들을 보내 줄 것을 호소한 바, 모금이 오자 중등부를 신설하고 3층 건물과 기숙사를 지었다. 새로운 서양식 3층 건물은 군산 지방에 명물로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오기도 하였다. 1910년 한일 병탄으로 식민지 교육이 실시되자 교회가 운영하는 대부분의 학교들이 폐쇄되었다. 충남 한산에 있는 한영 서원 중등부가 폐지되면서 이 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 군산 영명 학교로 오게 되었다. 영명 학교는 활기를 띠고 학생들은 즐거운 학교 생활을 하였다. 학제는 보통 6년과 그리고 고등과 4년으로 편성하였다. 성경은 모든 과에 매 학년 공통으로 교육시켰으며 세계사, 수학, 자연 과학, 기독 문학, 작문, 음악, 체육 및 율동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다. 영명 학교에는 투철한 민족주의자인 교사들이 있었다. 1910년대부터 박연세, 김인전, 문용기, 문정관, 이두열, 김수영, 고석주 등이 학생들을 가르치며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마침내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1919년 3월 5일 호남 최초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학교 출신으로 여러 정치인들로 활동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윤석구는 제헌 국회 의원[군산]과 체신부 장관을, 이요한은 제헌 국회 의원[옥구]과 제2대 전라북도 지사를 역임하였다.

당시 전북 서부 지방에 3,200명의 신자와 50여개의 교회당이 있어 교회 내에서 운영하는 사립 보통 학교가 21개 학생수가 436명 있었는데 여학교로는 비록 학생수가 51명이지만 멜볼딘 여학교 밖에 없었다. 이처럼 멜볼딘 여학교에서 배운 학생들을 졸업 후에는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 개별 교회에서 신문화 운동, 야학 운동을 일으켰으며 또 서울 세브란스 병원 부설 간호 학교로 진학하여 간호사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여성이 장인택의 큰 딸인 장한나를 들 수 있는데 멜볼딘 여학교의 보통과와 서울 정신 여학교 고등과를 거쳐 멜볼딘 여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쳤는데 영명을 졸업하고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최주현과 결혼하여 옥구 지경에서 살았다. 그는 자녀들을 잘 키워 한국 의료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안락 소학교, 영명 학교, 멜볼딘 여학교가 시작되면서 학생들과 교사들이 구암 교회에 출석하였으니 젊은 기상이 넘치며 특히 3·1 운동과 민족 계몽 운동의 요람지로 형성되어 갔다. 선교사들은 1904년에 군산 영명 학교를 보통과와 중등과로 분리하여 운영하게 되었는데 보통과는 안락 소학교라 하였다.

알렉산더 선교사가 군산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듣고 귀국하게 되었는데 그 때에 부위렴 선교사의 어학 교사 겸 조사인 오긍선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오긍선은 미국에서 훌륭한 의사가 되어 귀국하였고 알렉산더 의사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1911년에 안락 소학교란 명칭으로 학교를 세웠다. 초대 교장으로 개복 교회 홍종익 장로가 학교 운영을 맡고 개복 교회구암 교회가 힘을 합쳐 학교를 운영하였다.

개복 교회는 그 후 단독으로 영신 여학당을 운영하고 한편으로는 야학을 운영하였다. 이어서 1931년에는 영신 유치원도 설립, 운영하여 교육을 통하여 전도의 장을 만들어 갔다. 1924년 정광석 부부가 정경환과 그 자택에서 기도회로 시작하여 조맹선, 조상선, 최재순 씨의 조력을 얻어 신흥정 언덕[신흥동 14-2]에 신흥정 교회개복 교회에서 분립하였고, 1927년에는 전라북도 군산시 옥산면 원당리 627번지에 초가 3간을 수리하고 예배를 드림으로 개복 교회에서 정식으로 분립되어 원당 교회가 설립하게 되었다. 1933년에는 양석주, 강기영 두 장로를 중심으로 성도 30여명이 개복동 교회로부터 분리하여 군산부 송창동에 기도처를 마련하여 동부 교회를 설립하였다.

구암 교회는 농한기에 성경 학당을 운영하며 문맹 퇴치와 신문화 교육을 함으로 지경, 남전, 익산, 만경, 대창, 김제, 강경, 장강, 한산, 신천, 심지어 부여 등지에서부터 교인들이 몰려와 거리가 멀어 토요일에 와서 하룻밤 교회에서 묵거나 교회에서 철야 기도들을 하며 주일 예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1900년 군산 선교부까지 30리 길을 도보로 오가며 신앙을 키워가던 최흥서 등 7명은 중만자에 초가 3간의 예배당을 건립하고 지경 교회가 시작되었다. 1901년 전위렴 선교사의 전도로 서포리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1903년에는 채흥학에 의해 서수 교회가 설립되었다. 1905년 고형일, 고익순, 전학천, 김이추 등 여러 사람이 구암 교회에 등록하여 신앙 생활을 시작하는 중 1907년 옥구군 옥산면 지곡리 백토 부락의 고형일 집에서 고익순, 전학천, 김이추 등과 가족들이 목요 기도회와 주일 학교를 시작하므로 오늘의 지곡 교회가 시작되었다.[1959년 11월 24일 통합 합동이 갈라지면서 지곡 교회남성 교회가 분리되었다.]

1906년 3월 20일 군산 선교부의 전도 활동으로 옥산 지방에도 복음이 전파되었다. 구암 교회까지 거리가 멀어 여러 교인들이 어려움을 느낀 나머지 1907년 3월 15일 옥구군 회현면 세장리 장제 부락 임자익의 집 한 칸 방을 빌려 임자익, 이달순, 전준영, 최상섭, 김의추, 이극성, 염마리아[이달순의 부인] 등 7인이 예배를 시작하므로 남내기 교회[1957년 5월 10일 옥산 중앙 교회로 이름을 변경하였다]가 설립되었다.

[일제 강점기 및 6·25 전쟁기 군산의 교회]

군산 지역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 결과 군산의 개신교는 크게 성장하였다. 1919년 2월 26일 세브란스에 유학중이던 영명 학교 출신 학생 김병수의 독립 선언문 반입과 연락으로 주동자 박연세 장로를 비롯한 구암 교회 교인 및 초기 선교사 전위렴에 의해 세워진 영명 학교 그리고 전위렴의 아내가 세운 멜볼딘 여학교 교사와 학생들과 예수 병원 직원들이 주동이 되어 학교 기숙사와 다락방에서 독립 선언문을 복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감추고 3·5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때 호남 최초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는 등 일제 치하에서 민족의 자존심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편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교인을 버리고 갈 수 없었던 목회자들은 좌익계의 사람들에 의해서 체포되어 많은 희생자가 속출하였다. 힘에 밀린 인민군과 좌익 세력들은 후퇴하면서 교회를 소각하고 교인들을 불러 모아 학살하였다. 특히 군산시 미룡동에 위치한 원당 교회는 당시 홍산식, 영수 등을 포함한 31명이 학살되었으며, 그 옆에 있던 신광 교회도 김종대 장로 등 15명이 학살되었다. 현재 미성동에 위치한 해성 교회에서도 정연행 전도사 등 5명이 학살되는 등 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군산 지역의 개신교회 현황]

해방 이후 성장하기 시작한 군산 지역 개신 교회는 현재 총 600여 교회, 41개 교파가 다양한 모습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중에서 군산시에서 가장 큰 교단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 교단으로 150여 교회가 있다. 그 이유는 군산시에 최초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들이 미국 남장로회 소속의 선교사들인 이유가 가장 크다. 합동 교단의 대표적인 교회로는 개복 교회, 구암 교회, 드림 교회, 군산 중앙 교회 등이 있다. 그 밖에 한국 기독교 장로회에 소속된 교회로는 성광 교회, 세광 교회 원당 교회 등이 있으며, 장로교 통합 교단에는 중부 교회, 동부 교회, 남부 교회, 신흥 교회 등이 있고, 성결 교단에는 중동 성결 교회와 중앙 성결 교회, 남군산 교회 등이 있다. 그리고 감리 교단의 교회로는 은파 교회 등이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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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 제목 내용
2022.10.24 내용 현행화 그는 1832년 7월 17일 오늘날의 서해 5도 가운데 하나인 백령도에 정박하여 해당 지역 지방관에게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당시 충청도 서해안인 홍주(洪州), 고대도(古代島) 또는 元山島[현재 보령시]에 정박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귀츨라프는 장산곶을 비롯하여 군산 지역에도 들러 전도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는 1832년 7월 17일 황해도 조니진[지금의 몽금포]에 정박하여 해당 지역 지방관에게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당시 충청도 서해안인 홍주(洪州), 원산도(元山島)[지금의 보령시]에 정박하였다. 8월 12일 떠나갈 때까지 원산도에서 전도 활동을 하였다.
2019.11.08 오자 수정 1984년~1910년 -> 1894년~1910년
이용자 의견
김* '군산지역의 초기 선교사들'의 세번째 줄 1984년이 아니고 1894년이라야될것 같네요.
  • 답변
  • 디지털군산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오자를 수정하였습니다. 의견 개진에 감사드립니다.
2019.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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