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4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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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遊廓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중규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 있었던 일본인 유흥업소.
[개설]
최초의 유곽은 부산에 1902년 만들어졌으며 대규모의 공식적 유곽인 공창은 서울의 신정 유곽[1904년]이 시초였다.
군산은 청·일 전쟁 후 일본에서 일확천금을 쫓아 불나방처럼 모여든 일본의 모리배들로 뒤덮였다. 이들의 초창기 사업이라는 것이 고리대금업과 토지 브로커 등이었음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일본인들은 돈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자들이었는데 이들에게 있어 유곽은 또 다른 황금 알을 낳는 사업일 뿐이었다.
군산의 유곽 사업은 1900년대 후반 일본 관리와 지역 유지들이 앞장서서 만들었다. 당시 유곽 설립에는 상당한 이권이 달려 있어 유곽이 들어설 후보지를 서로 자신의 땅에 유치하려는 지주들 간의 상당한 갈등과 혼란이 있었다. 당시 후보지로는 신흥동 산수정[현 명산 시장]과 팔마산 동쪽 평지[경장리] 그리고 경포리 부근 해변가[고속 터미널 부근] 등 3곳이 경합을 벌이다가 결국은 신흥동 산수정이 선정되었다. 이 땅은 군산의 금융왕이라고 불리던 사토오[左藤]란 자의 땅이었다. 사토오는 본래 논과 작은 저수지가 있던 이 지역 넓은 땅을 싼 가격에 매입하여 그 중 유곽이 들어설 오천 평을 일본 민회에 무상 기증함을 조건으로 내세워 다른 유곽 후보지 둘을 물리치고 유곽을 유치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유곽이 들어서면서 주변 지역 땅 값이 상승하여 큰 재산을 일구는 경영의 묘를 발휘한 자이다.
당시 유곽 후보지 선정을 위하여 일본 민단 내에 선정 위원회까지 구성되었고 군산 이사청[1905년~1910년]의 이사관이 직접 관여했음을 볼 때 유곽의 설치가 군산 지역 일본인들의 최대 관심사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후 현 신창동 인근에 소규모 유곽이 또 한 군데 설치된다. 1930년대 군산 명산동 유곽에는 일본인 유곽이 8곳으로 61명의 창기가 있었고 조선인 유곽은 3곳[금강루, 청남루]으로 26명의 창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공식 조사에서 빠진 숫자가 더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인 유곽에는 일본 여인이 대부분이었으나 일본 옷을 입은 한국 여인도 조금 섞여 있었고 한국인 유곽에는 한복을 입은 한국 여인만 있었다고 한다. 유곽의 출입 비용은 3원 내지 5원씩 했는데 당시 쌀 한 말이 1원 50전이었으니 쌀 두 말 가격이라는 거금이 필요했다.
유곽 여인들의 화대는 정복자였던 일본 여인들이 한국 여인들보다 1원 정도 비쌌다고 한다. 유곽에 손님이 들어오면 나이 먹은 여인이 손님을 맞이하여 거실로 안내하고 거실에는 그 유곽의 여인들 사진이 걸려있어 손님은 사진을 보고 여인을 선정했다고 한다. 여인이 결정되면 손님은 방으로 안내되어 작은 상에 담겨 나온 차와 쎈비 과자를 먹으며 여인을 기다리는 게 순서였다. 당시 유명했던 유곽은 현재도 제 모습을 갖추고 있는 칠복[명산동 화교 소학교]과 군산루[명산동 코스코 마트] 그리고 그 주변의 송학루, 송야, 옥가 등이다.
1956년 장미동에 있던 화교 소학교가 옮겨와 자리한 칠복(七福)은 1925년 만들어진 목조 2층 건물로 당시 유곽의 흥청거림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유곽들이 자리하고 있던 명산동 시장 안에는 아직도 옛 유곽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군산의 유곽은 일제 강점기 번성을 누리다가 해방 후 미 군정청의 공창 제도 폐지 방침[1948년 2월 14일]에 의거 폐지되었으며 6.25 후에는 피난민들의 임시 수용소로 사용되어 유곽 한 곳에 30여 가구가 생활하는 공간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곳은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어 ‘유곽 시장’으로 불리다가 현재는 명산 시장이라 칭하고 있다.
군산의 유곽은 명산동 외에도 영화동의 일본인 시장 주변에 고급 요정의 형태로 존재하였는데 해방 후 이곳은 미군 병사들을 상대로 한 유흥업소로 변신을 하여 미국인 거리가 조성되었다. 이후 미성동의 아메리카 타운이 만들어져 그곳으로 이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