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238 |
---|---|
한자 | 朴淵世 |
분야 |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민정 |
[정의]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활동한 개신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박연세는 1919년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3·5 만세 운동을 주모한 죄로 체포되어 복역한 후, 평양 신학교에서 수학하여 목회자가 되었다. 전라북도 이리[현 전라북도 익산시]와 전라남도 목포에서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1942년, 목포 양동 교회에서 신사 참배 거부와 설교 내용이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불경죄, 보안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형을 선고 받았다. 1944년 2월 대구 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했다.
[활동 사항]
박연세는 군산 남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한 후 모교에서 교사로서 한문과 역사를 가르쳤다. 이 시기 동안 서리 집사로 봉사하다가, 1916년부터 구암 교회 안수 집사로 활동하였다. 교사로서 집사로서 교회 안팎으로 신망을 받았다. 1919년 2월 세브란스 의전에 진학한 제자 김병수로부터 서울에서의 만세 운동 계획을 전해 듣게 되자 군산에서도 호응하기로 했다. 이에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비밀리에 만들어 1919년 3월 6일에 거사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탄로되어 다른 주동자들[이두열, 김수영]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았던 사람들에 의해 계획보다 하루 앞당겨 3월 5일 군산의 학생, 시민들은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박연세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1920년 여름 출옥한 후, 1922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시절 『신학지남(神學指南)』에 두 편의 설교문을 기고하였다. 1924말 신학교를 졸업하고 , 1925년 전북 노회에서 강도사 자격을 취득하였고, 1925년 5월 목사로 장립되었다.
첫 부임지는 이리[현 전라북도 익산시] 부근의 동련 교회와 고현 교회였다. 그러나 1년후 1926년 9월 호남 최대의 교회 중 하나였던 목포 양동 교회에 부임하였다. 이곳에서 1942년 11월 일본 경찰에 검거 투옥될 때까지 만 16년간 재임하여 목포 지방 교회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