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2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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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天敬 |
이칭/별칭 | 洪千京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희진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옛 옥구] 출신 독립운동가.
[개설]
홍천경은 1919년 3월 5일 전북 옥구에서 영명 학교 재학중 교사 이두열, 김수영 등이 주도한 군산 장날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복사하는 한편, 고준상 등 동료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을 선도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어 징역 6월의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홍천경은 1919년 3월 5일 군산[현 전라북도 군산시] 장날의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 군산 지역에 처음으로 독립 선언서가 도착한 것은 3월 1일이었다. 서울에서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온 김병수(金炳洙)는 독립 선언서를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현 전라북도 군산시 구암동]에 있는 영명 중학교(永明中學校)[현 군산 제일 중·고등학교] 교사 박연세(朴淵世)·이두열(李斗悅) 등에게 전달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3월 6일 군산 장날을 기하여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협의하였다. 이들은 독립 선언서를 복사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거사 계획이 누설되어 영명 중학교 박연세 등의 선생들이 군산 경찰서로 잡혀감으로써 거사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거사를 하루 앞당겨 3월 5일 독립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홍천경을 비롯한 학생들이 앞장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거리로 행진하였다. 이때 같은 기독교측의 여학교 학생들도 이에 동참하였다. 또한 기독교 신자들도 가담하고 부근 주민들도 함께 나섰다. 이들 시위 군중들은 평화동(平和洞)·영동(榮洞)을 거쳐 본동(本洞) 큰 거리에 이르는 동안 시위군중은 더욱 증가하여 500여 명에 달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 경찰들은 재향 군인까지 동원하는 등 긴급 출동하여 이리(裡里)[현 전라북도 익산시] 주재 헌병대의 지원을 받아 주도 인물을 강제 검거하고 시위 군중을 해산시켰다. 홍천경은 이때 체포되어, 1919년 4월 30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6월을 언도받고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6월 21일 고등 법원에서 형이 확정되고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