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199 |
---|---|
한자 | 李炳寬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희진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옛 옥구] 출신 독립운동가.
[개설]
1919년 3월 5일 서울에 있는 남대문역에서 오세창 등 여러 동지들의 학생단 제 2회 독립 만세 시위 운동에 참여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는 등 활동을 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5일 중앙 학교 학생으로 서울역 앞에서 벌어진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
3월 4일, 서울 지역 학생들은 비밀리에 회합을 거듭하여 3월 5일 대대적인 시위 운동을 계획하였다. 3월 5일 아침 예정대로 서울역 광장에서 일대 시위 운동이 전개되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서울역 광장에는 시위 군중이 점점 모이기 시작 하였다. 대부분 학생들이었고 그 외 다수의 청년들이 참가하였다. 중앙 학교 3년생이었던 이병관도 참가하였다.
강기덕과 김원벽이 독립기를 들고 선두에 섰다. 그 뒤를 학생·군중들이 만세를 고창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남대문 쪽을 향해 나아갔다. 시위 행렬이 남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경비중이던 일본 경찰이 이를 저지하였다. 그러나 약 일 만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 군중은 이 저지선을 뚫고 행진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강기덕과 김원벽 등 오십여 명이 지원나온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지만, 시위 행진은 계속되었고 보신각에 다다랐을 때 더욱 증강된 경찰대가 총검을 휘두르며 강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중상을 입고 75명이 종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병관은 3월 9일 고향으로 가기 위해 서울역에 갔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때 체포된 이병관은 1919년 11월 6일 경성 지방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6월, 집행 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