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김영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1179
한자 金永祥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구희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6년 5월 1일연표보기 - 김영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5일 - 김영상 피체
활동 시기/일시 1919년 6월 12일 - 김영상 고등 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투옥
추모 시기/일시 2009년 - 김영상 대통령 표창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 3·1 운동 발발
출생지 김영상 출생지 - 전라북도 군산시
활동지 김영상 활동지 - 전라북도 군산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옛 옥구] 독립운동가.

[개설]

김영상은 1919년 3월 5일 전라북도 군산에서 김성은, 유희순의 권유로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김영상은 1919년 3월 5일 전라북도 군산에서 예수교 영명 중학교 교사와 학생 등이 주도하여 전개한 독립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영명 중학교 교사 이두열 등이 서울로부터 독립 선언서와 만세 운동에 관한 연락을 받은 것은 3월 1일이었다. 곧 이두열은 같은 학교 교사 고석주와 예수교인 김성은개정면의 예수교 병원 사무원 양기준 등과 의논하여 3월 6일 군산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이두열, 김성은 등은 학생들에게 학교 기숙사 2층에서 독립 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게 하며, 각 방면으로 연락하여 당일 집합 독립 만세 시위를 하도록 진행하였다. 김영상은 이때 김성은 등으로부터 만세 운동에 가담할 것을 제의받고 흔쾌히 수락하였다.

그런데 만세 시위 전날인 3월 5일 만세 운동 계획이 사전에 드러나 영명 중학교에서 오전 수업이 끝났을 때 군산 경찰서의 일본 경찰이 나타나 이두열 등의 교사를 연행하여 갔다. 이에 교사 김윤실과 학생들은 긴급 회의를 갖고, 지금 당장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학생 양기철 등이 앞장섰고, 같은 예수교 계통의 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부르며 군산 시내로 들어갔다. 만세 대열이 지나갈 때마다 부근 주민들과 보통 학교 학생 등이 합류하여 군산의 중심 거리에 이르는 동안 시위 군중은 5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때 김영상도 시위 대열에 합류하여 선두에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시위 군중 일부는 경찰서로 밀려가서 구속된 교사들의 석방을 요구하기도 했다. 일본 경찰은 당황하여 긴급 출동하였고, 소위 재향 군인까지 동원하며 이리 주재 헌병대의 응원을 얻어 시위 군중을 강제 해산시켰다.

김영상은 이날의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광주 지방 법원과 대구 복심 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1919년 6월 12일 고등 법원에서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9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3권(독립운동사 편찬 위원회, 1971)
  • 국가 보훈처 공훈 전자 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