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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익수리조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94
한자 臨益水利組合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09년연표보기 - 임익수리조합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1년연표보기 - 임익수리조합, 전북 수리 조합으로 합병
최초 설립지 임익수리조합 - 전라북도 익산군 황등면 황등리
성격 수리조합
설립자 후지 간타로[藤井寬太郞]

[정의]

1909년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 설립된 수리 조합.

[개설]

요교제는 우리나라 3대 제언 중 하나였을 만큼 과거에는 규모가 컸지만 조선 초 이래 폐제되었다. 임익수리조합 사업은 폐제된 요교제를 축조하고 여기에 가둘 용수를 삼례 비비정 부근의 취수구에서 수로를 가설하여 끌어오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수리 조합을 구상한 사람은 ‘조선의 수리왕’으로 불리던 후지 간타로[藤井寬太郞]이었다.

[설립 목적]

후지 간타로[藤井寬太郞]는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에 주목하여 면모 유입과 미곡 유출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은 상업 자본가이다. 그는 한국을 일본 과잉 인구 흡수지·식량 공급지로 주목하고 소작제 농장 경영을 통한 미곡 증산과 인구 문제 해결을 위한 이민 사업을 구상하였다. 그런데 후지 간타로는 대규모 토지를 단기간에 확보하면서 천수답·미간지를 집중적으로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후지 간타로는 수리 시설을 갖추고 생산력을 높여서 고율 소작료를 수취하는 것을 농장 경영의 기본 방침으로 삼았다. 따라서 수리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로는 소작료를 안정적으로 징수하기 어려웠다. 후지 간타로가 임익수리조합 사업을 추진한 배경에는 그의 토지 집적 형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후지 간타로의 ‘수리 조합 설치 계획’은 요교제를 복구하여 익산군 황등면, 북일면, 오산면과 옥구군 서수면, 임피면, 대야면 일대 약 36,555,371㎡에 농업 용수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1909년(융희 3) 2월 후지 간타로는 임익수리조합을 설립하고 조합장에 취임했다. 1911년 5월에는 간선 수로와 배수로 등 설비 공사와 인수로 개설 공사가 완료되었는데 사업비는 모두 316,500원에 달했다. 사업 자금은 조선 총독부의 지불 보증 아래 한호 농공 은행 및 전주 농공 은행으로부터 총 20만원을 대출받았다.

[현황]

임익수리조합 설립 당시의 조합원은 천기(川崎) 농장, 궁기(宮崎) 농장, 도곡(島谷) 농장, 삼곡(三谷) 농장, 진전(眞田) 농장, 남전(楠田) 농장 등 일본인 지주 21명과 한국인 토지 소유자 829명이었다. 임익수리조합은 후지 간타로 처럼 대규모 천수답 내지 저수량지·미간지를 소유한 일본인 지주가 다수의 한국인 토지 소유자를 편입시켜 설립한 것이다. 몽리 구역 밖의 한국인 토지 소유자들은 임익수리조합 설치 단계부터 격렬한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임익수리조합 관개 수의 공급방식은 요교제 안의 우량답(優良畓) 약 9,917,355㎡의 수원을 빼앗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의의와 평가]

임익수리조합은 수리 시설이 미비된 상태에서 시행되는 농사 개량의 한계를 인식한 후지 간타로가 다수의 한국인 토지 소유자를 편입시켜 설립한 것이다. 그러나 수리 조합 사업은 한국 농촌 사회의 토지 소유 구조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수리 조합의 설립 과정은 몽리 구역 외 토지 소유자에 대한 수원의 탈취 과정이었다. 그리고 고액의 수리 조합비는 몽리 구역 내 조합원의 토지 방매의 일본인 지주로의 토지 집중 현상을 초래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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