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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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群山線開通-年-鐵-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조종안 |
개통 시기/일시 | 1912년 3월 6일 - 호남선 지선으로 군산선[군산~이리] 개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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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 시기/일시 | 1924년 6월 1일 - 임피역과 개정역, 간이역으로 영업 개시 |
개통 시기/일시 | 1944년 4월 - 북선 제지 군산 공장 전용선[페이퍼 코리아선] 개통 |
완공 시기/일시 | 1953년 2월 - 미군 부대 보급품을 수송하는 군산 비행장선[옥구선] 완공 |
개칭 시기/일시 | 1953년 6월 1일 - 군산선 지경역이 대야역으로 역명 변경 |
운행 시기/일시 | 1996년 5월 15일 - 비둘기호 운행 중단, 도시형 통근 열차 통일호 운행 |
이전 시기/일시 | 2007년 12월 31일 밤 10시 25분 - 군산발 익산행 열차 운행 종료, 군산역이 전라북도 군산시 내흥동의 신 군산역으로 이전 |
개칭 시기/일시 | 2008년 1월 1일 - 구 군산역에서 군산 화물역으로 변경 |
폐쇄 시기/일시 | 2011년 - 군산 화물역 폐쇄 |
현 소재지 | 군산 화물역[구 군산역] - 전라북도 군산시 구암3.1로 12[대명동 385-86] |
현 소재지 | 신 군산역 - 전라북 군산시 내흥2길 197[내흥동 455] |
성격 | 철도 |
관리자 | 한국철도공사[KORAIL] |
[정의]
군산선 철도 개통과 군산 지역의 경제·사회적 변화
[개설]
인류 역사와 함께해온 ‘길[道]’은 황토 냄새 그윽한 황톳길을 비롯해 강가나 숲 속의 오솔길, 돌담을 따라 이어진 마을의 고샅길, 강변의 자갈 길, 호젓한 산 길, 들 길, 지름 길, 자동차 길, 바닷길, 기찻길,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정치·경제·문화·종교]를 연결하여 ‘문명의 길’로 불리는 실크로드[비단 길]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우리나라에서 ‘길’이라는 말은 신라 향가에 처음 등장한다. 신라 진평왕(真平王)[?~632] 때 융천사(融天師)[?~?]가 지은 「혜성가(慧星歌)」와 효소왕(孝昭王)[?~702] 때 득오가 지은 「모죽지랑가(慕竹旨郎歌)」에 ‘도(道)’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나온다. 그 후 지역과 지역을 이어주며 소통의 끈으로 발전한 길은 근대 문명의 상징인 철도가 일제에 의해 놓이면서 철저히 파괴되고 변질된다. 철도는 수운(水運)을 몰락시켰으며 우리의 식량을 갈취하고, 수많은 동포를 전쟁터로 내모는 수단이 됐다.
[철도의 개통]
조선에서 기차를 처음 타본 사람은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 체결 직후 수신사로 일본에 건너간 예조 참의(礼曹参議) 김기수(金綺秀)[1832~?]였다. 일행 76명과 약 2개월 동안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그는 시승기(試乗記)에 “화륜거는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비처럼 날뛰었다. 좌우 차창으로 산천과 집, 사람이 보이기는 했으나 앞에서 번쩍 뒤에서 번쩍하여 도저히 종잡을 수 없었다.”라고 적었다. 김기수는 화륜거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대한제국(大韓帝国)은 1899년[광무 3] 9월 18일 노량진~제물포를 잇는 경인선[33.24㎞] 개통으로 철도 시대의 막을 열었다. 당시 기차는 평균 시속 20㎞~22㎞, 최고 60㎞로 달렸다. 노량진~제물포를 하루 두 차례 왕복했으며 편도 1시간 30분이 소요됐다. 『독립 신문』은 당시 기차 모습을 “화륜거 구르는 소리가 우레 같아 천지가 진동하는 듯하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라고 소개했다.
철도의 영향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전통 생활 방식이 하루아침에 바뀌고, 국가 경영의 중심을 직선으로 뻗은 철도에 빼앗겼다. 기차에서 남녀 칠세 부동석이 깨지면서 외형적으로나마 남녀평등이 실현됐다. 전통적인 시간관념도 크게 흔들었다. 한가했던 촌락은 도시가 되고, 기존 도시는 몰락했다. 충청남도 도청 소재지가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긴 게 대표적인 사례이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기 이전 이미 경부 철도 건설에 필요한 철도 용지를 정부로부터 공급받았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우리 정부는 일본 차관을 빌려 민간인 토지를 구매, 일본에 제공하였다. 또한, 경의선·마산선 등은 일본이 철도 용지를 저렴한 가격에 강탈하다시피 수용하여 주민으로부터 원성을 샀다. 모두가 일제의 철저한 사전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철도 건설 노동자의 강제 동원과 살인적인 사역, 일본인 노동자들의 잔악한 횡포로 주민들은 일본인을 증오하고 철도 건설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철도는 조선인보다 일본인에게 필요한 문물이었다. 우리의 식량과 수많은 자원이 일본으로 반출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철도는 문명의 이기가 아니라 일제 침략과 수탈의 도구일 뿐이었다.
경부선·경의선이 부설되자 이 땅의 지식인들은 철도를 ‘근대의 표상’으로 대하였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1890~1957]은 1908년(융희 2) 창가 「경부 철도가(京釜鐵道歌)」까지 지어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 소리에 /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 나가서 /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 같으니 /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라고 노래한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1950]의 소설 『무정(無情)』에 기차와 기차역이 수시로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근대의 새벽을 알리는 기적 소리는 ‘식민지 어둠을 예고하는 불길한 소리’였다. 철도사업의 주체가 되지 못했을 때부터 불길함은 예고됐다. 철도가 확장 될수록 조선 백성의 삶은 궁핍해져 갔다.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침략하기 위해 이 땅에 가설했던 철도들, 그 철도들은 일제 식민 통치 36년 동안 경성[서울]이 아닌 조선 총독부로 향했던 것이다.
[일본과 일본인 농장주들이 그어놓은 철길]
1899년 개항 당시 군산의 일본인은 20가구에 77명[한국인 511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1900년에는 131가구에 422명[한국인 780명]으로 늘고,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 되는 1910년에는 2,050명[한국인 2,835명]으로 급증한다. 이는 공식 기록에 의한 수치이고, 도서(島嶼) 지역과 경포 지역[경장동 일대] 불법 이주자를 합하면 그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1899년(광무 3) 12월 일제는 조계 지역 행정을 맡아보는 거류지회를 설립하고, 1901년(광무 5) 3월에는 조선 침략 선발대인 군산 일본민회[1906년(광무 10) 통감부령에 의해 ‘군산 거류민단’으로 변경됨]를 조직한다. 일본인들은 거류지 조성과 경영비용을 토지 매각에서 조달했다. 조선 정부로부터 평당 30전에 불하받아 경매 부치면 평당 10원 20원, 많을 때는 80원까지 치솟았다.
군산에는 소자본을 가지고 들어와 농지를 헐값에 사들이거나 약탈해서 부자가 된 일본인 농장주가 많았다. 당시 군산·옥구 지역 상전(上田)은 15원~20원, 하전(下田)은 10원 이하였다. 개항과 함께 시작된 일제의 농지 약탈은 러일 전쟁[1904년~1905년] 중에도 계속됐다. 일본인 농장주들이 확보한 쌀의 출구는 군산항이었고, 도착지는 일본 오사카[大阪]였다. 빠른 운송 수단이 절실해진 그들은 철도 건설을 강력히 청원하였다.
호남선 착공은 1896년(고종 33) 프랑스인 구루다가 조선 정부에 부설권을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당시에는 서울~목포 사이를 연결한다 해서 ‘경목 철도’라 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자력으로 부설할 것을 결의하고 1904년(광무 8) 5월 호남 철도 주식회사에 강경~군산, 공주~목포 간 철도 건설을 인허한다. 그러나 일제는 군사상 중요한 철도를 개인에게 허가함은 부당하다며 조선 정부에 압력을 넣어 허가를 취소하게 하고 부설권을 손에 쥔다.
1905년(광무 9) 을사 늑약 이후 호남선 부설이 본격화된다. 쌀의 고장 전라북도에서는 호남선 통과 지점을 놓고 여러 논의가 일었다. 전주를 통과시키려는 기성회가 발족하여 유치운동이 활발한 가운데 지역 유림은 반대했다. 풍수지리를 따져 명당의 기운과 지맥을 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면 군산에서는 철도 유치를 적극 추진하였다. 하지만 호남선이 군산을 통과하기에는 많은 난제가 뒤따랐다.
전라북도에서는 호남선 노선을 놓고 대농장주들 간에 암투가 벌어진다. 이해관계가 크기 때문이었다. 동산 농장 소유주 이와사키[岩崎]는 김제에서 삼례 통과를, 군산의 대농장주 오오쿠라[大倉]는 지경[대야] 통과를 고집하였다. 결국, 양자가 주장하는 중간 지점인 솜리[益山]를 연결 지점으로 결정하였고, 호남선은 1910년(융희 4) 1월 1일 착공되어 1914년 1월 22일 개통된다.
군산에서 출발하여 개정, 지경, 임피, 오산, 익산에 이르는 군산선[23.1㎞]도 군산·옥구 지역 농지를 가장 많이 소유한 미야자키[宮崎] 농장을 비롯해 옥구군 개정면의 구마모토[熊本] 농장, 발산의 시마타니[島谷] 농장, 임피·서수의 가와사키[川崎] 농장 등 대단위 일본인 농장 7개소를 꿰뚫고 1912년 3월 6일 완공된다. 결국, 전라북도 지역 철도 노선은 일본인 대농장주들 입맛에 맞게 그어졌다.
[군산선 개통과 지역 경제·사회적 변화]
호남선 지선으로 1912년 3월 6일 개통된 군산선은 짧은 단선[23.1㎞]이었다. 하지만 쌀의 반출량이 수십, 수백 배 늘어난 것을 비롯해 인구 증가와 역세권 확장, 철도를 통한 일본 자본과 물자의 조선 내륙 시장 잠식, 여객과 화물 수송 확대로 인한 강경 시장과 조선 객주들의 몰락, 쌀 수탈과 만주 침략의 전진 기지 병행 등 일제는 기대 이상으로 목적을 달성한다.
군산선 개통으로 군산은 도시 권역이 확대되기 시작한다. 20년이 지난 1932년 역세권 인구가 10만 명을 웃돈다. 3만 5000명을 밑돌았던 1930년 군산 인구를 고려하면 놀라운 숫자이다. 직업도 농업에서 상업과 도시 서비스업 및 공업 종사자로 확대된다. 특히 1920년대 중반 공장이 40개를 넘어서고, 그 가운데 정미소가 12개를 차지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군산선 개통 당시 군산역 승하차 인원은 각각 6만 명을 웃돌았다. 10년 뒤인 1922년에는 연인원 각각 20만 명을 넘어선다. 특히 태평양 전쟁 시기인 1943년에는 승하차 연인원이 각각 60만 명을 넘어서며 개통 이래 가장 많은 숫자를 기록한다. 이러한 여객 수송은 해방 이후에도 크게 줄지 않아 승하차 연 인원은 각각 50만 명을 넘나든다. 일제 강점기 군산선 이용 승객은 80~90%가 일본인이었다.
군산역 소화물 도착과 발송도 점차 늘어 1940년경 최고치에 이른다. 1912년 3만 톤을 시작으로 전시하인 1940년경 합계 40만 톤을 웃돌아 절정에 달한다. 화물은 시대별로 편차를 나타내는데, 1920년대까지는 소금, 면포, 콩깻묵, 석탄 등이 많았다. 1930년대에 들어 비료가 가세하였고, 전쟁이 치열해지는 1930년대 후반에는 군용품이 늘어난다.
군산항의 쌀 반출은 부산에 필적할 만한 수준이었다. 철도편으로 군산에 도착하는 쌀의 양은 1916년 4만 톤을 넘어, 1927년 15만 톤, 1933년 20만 톤을 넘기면서 최고에 이른다. 특히 산미 증식 계획 기간에 쌀이 대거 군산에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까닭은 일본으로의 쌀 반출이 그만큼 왕성했기 때문이었다.
1931년 8월 1일 충남선[장항선] 전 구간이 개통되고, 같은 날 군산항역이 영업을 개시하면서 군산 지역 일본인들은 대륙으로 뻗어 나가는 길을 잇고자 군산~장항 철교 가설을 총독부에 청원한다. 청원장 요지는 군산 발전과 전라북도, 전라남도, 충청북도, 충청남도의 산업발전에 큰 영향을 끼칠 것 등으로 전라북도 내무국 토지과에서 1932년 10월 현지 조사까지 마쳤으나 과다 예산을 이유로 실현되지 못한다.
[영욕의 세월을 시민과 함께해온 군산선]
군산선[23.1㎞]은 1912년 3월 6일 개통된 군산~이리 구간 철도를 말한다. 일제는 호남의 관문인 군산을 곡식 수탈의 전진 기지로 삼기 위해 호남선 강경~이리 구간과 군산선을 동시에 개통한다. 1921년 철도가 내항까지 연장되고, 1924년 6월 1일 임피역과 개정역이 간이역으로 영업을 개시한다. 1929년 12월 1일부터는 64인승 기동차가 군산~전주 운행을 시작한다.
1931년에는 철도가 군산 세관 건물 뒤편까지 연장되고, 그곳에 들어선 군산항역이 시발역이 되면서 군산선은 총연장 24.7㎞로 늘어난다. 1944년 4월 북선 제지 군산 공장 전용선[페이퍼 코리아선]이 개통된다. 1953년 2월 미군부대 보급품을 수송하는 군산 비행장선[옥구선]이 완공되고, 1953년 6월 1일에는 군산선 지경역이 대야역으로 역명이 변경된다.
일제의 수탈이 절정에 달하고, 군산이 호남의 대도시로 주목받기 시작하는 1930년대 들어서는 중앙 언론사 군산 지국이 주최하고 군산역이 후원하는 금강산 관광[침대칸 이용]이 붐을 이룬다. 1932년 8월 20일 자 『동아 일보』는 7박 8일 일정으로 내금강·외금강, 해금강, 원산, 경성 만몽(満蒙) 박람회 등을 돌아보는데 참가비는 1인당 26원으로 기차, 자동차, 선박, 숙박료, 식대 등 경비는 일절 주최 측이 부담한다고 적고 있다.
1939년 11월 1일 군산역 열차 시간표를 보면 출발은 오전 5회[첫차 04시 40분] 오후 9회[막차 22시 55분]이고, 도착은 오전 6회[첫 도착 00시 56분], 오후 8회[마지막 도착 22시 00분], 하루 28회 운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단선임에도 열차마다 2등 칸을 배치해서 눈길을 끈다. 특히 20년이 지난 1959년 운행 횟수보다 8회나 많아 식민지 시절 군산의 경제 위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일제 강점기 군산선을 통해 오간 화물은 곡물과 일본 상품, 군사 물자 등이 주종을 이뤘다. 해방 후에는 주한 미군 화물 운송과 군산항 주변 공장[한국 주정, 화력 발전소 등]과 째보 선창 인입 철도 역할도 수행했다. 6·25 전쟁 때는 역사(駅舎)가 소실되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전쟁 후에는 회사원, 통학생, 상인 등 서민층이 주 고객이었으며 객차가 부족해 승객들이 화물칸을 이용하기도 했다.
기차가 대중화되는 1960년대에는 군산~대전 구간을 운행하는 열차가 처음으로 등장해서 관심을 모았다. 매일 새벽 군산역을 출발하는 군용 열차로 사람들은 철도 운송 사령부를 뜻하는 영어 약자 ‘알티오(RTO)’라 불렀다. 이리에서 호남선이나 전라선으로 갈아타야 하는 불편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주로 대전과 서울을 자주 오가는 사업가와 통학생들이 이용하였다.
운송의 핵심 역할을 담당해 온 철도는 도로 교통의 발달과 자가용 증가로 승객이 감소한다. 군산선 열차는 1988년 비둘기호 하루 왕복 26회, 1990년 20회, 1993년 14회 운행했다. 1996년 5월 15일에는 비둘기호 운행을 중단하고 도시형 통근 열차 통일호를 군산~익산~전주 간 하루 왕복 14회 운행한다. 여객 수송 업무를 마감하는 2007년[군산~익산]에는 하루 왕복 16회 운행한다.
1970년~1980년대에는 군산역 광장에서 익산이나 전주행 합승 택시[총알택시]가 호황을 누리다가 자가용이 증가하면서 사라졌다. 그렇게 군산 시민과 애환을 함께해온 군산선 열차는 증기 기관차, 비둘기호, 통일호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1세기 가까이 운행해오다가 2007년 12월 31일 밤 10시 25분 익산행 열차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여객 운송 기능을 군산시 내흥동의 신 군산역에 넘겨준 군산역은 2008년 1월 1일 대야~군산 구간이 군산 화물선으로 지정되면서 군산 화물역으로 바뀐다. 홀로된 보초병처럼 외롭게 자리를 지키던 화물역 건물도 2011년 경암동 2호 광장~군산역 로터리 4차선 도로 공사 때 사라진다. 지금은 붉게 녹슨 철길과 덩그러니 서 있는 급수탑만이 영욕의 100년을 말해주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군산 화물선은 운행이 중지된 상태로 매월 3~4회 옥구선을 이용하는 부정기 화물만 거친다. 앞으로 한국 철도 시설 공단이 추진하는 익산~대야[14.11㎞] 구간 복선전철화 사업과 군산 2국가 산업 단지 인입 철도가 완공되면 옥산 신호장에서 옥구선과 연결되어 군산 2국가 산업 단지 철도로 대체될 것으로 전망된다.
[군산선의 종착역 군산항역]
제3차 축항 공사[1926년~1933년]가 시작되는 1920년대 중반부터 군산역을 장미동의 세관 부근[현재 한국 전력 군산 지점 뒤편]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1926년 10월 7일 자 『동아 일보』는 군산~장항을 잇는 객선 취항에 대비해 도선장 부근으로의 역사 신축 이전과 부근에 호텔 건립도 계획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1926년 군산부[군산시]는 12월 조사에서 인구 2만 2537명에 물자 집산액 2억 원, 무역액 7천만 원, 적출미 1백 5십 만석으로 집계되자 군산역 이전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1927년 8월 ‘부역(府駅) 확장 조사 위원회’를 설치한다. 이어 타당성 조사와 현장 답사를 마치고 공사를 시작, 1931년 8월 1일 군산항역 역사(駅舎)가 준공되어 영업을 개시한다. 당시 군산역 이용 승객은 70만에 이르고 인근 지역 도선 승객은 30만을 넘어섰던 것으로 전해진다.
군산역은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했으나 군산항역은 간이역으로 개찰구만 있는 작은 규모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부둣가인데다 군산~장항을 잇는 도선장과 이웃하고 있고, 일본인 거주지[영화동, 장미동, 월명동]와 가까웠으며 관공서, 금융 기관, 일본인 회사와 대형 창고가 밀집된 지역이어서 이용객은 물론 화물량도 이전하기 전보다 많았다.
1930년대 군산항역~전주 구간을 오가는 열차는 경전철로 불리는 협궤 열차였다. 편도 1시간 40분 소요됐고, 요금은 1원 40전[당시 부두노동자 쌀 한 가마 운반비 1전]이었으며, 하루 왕복 4회 운행하였다. 주로 일본인들이 이용했던 군산항역은 1943년 12월 1일 화물 운송 기능을 군산 부두역에 넘겨주고 문을 내린다.
군산 부두역은 군산시 장미동[일제 강점기 미곡 검사소 부근]에 있었던 철도역으로, 화물만 취급했다. 일제가 원활한 물자 수송을 위해 군산항역 대안으로 개설한 역이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폐쇄됐으나 마루보시[丸星], 미창 등이 수하물 작업장으로 사용하다가 1970년대에 중단되고 건물이 헐렸으며 2012년 주차장 공사로 선로 시설이 모두 철거된다.
[옥구선]
옥구선[11.8㎞]은 군산선 지선으로 군산~옥구 구간 철길을 말한다. 6·25 전쟁 중 미 8군 군산 비행장 보급품 수송을 위해 부설된 군사용 철도이다. 1952년 5월 20일 유엔군에 의해 착공, 1953년 2월 25일 완공됐다. 초기 공식 명칭은 ‘군산 비행장선’이었으나 발음하기가 불편하다 하여 1955년 9월 1일 옥구선으로 개칭된다.
‘미군 부대선’으로도 불리었던 옥구선은 주민의 요청으로 여객 열차[비둘기호]가 운행을 시작한다. 1955년 8월 1일 상평역[1980년 12월 31일 폐역]이 무배치 간이역으로 업무를 개시한다. 그래서 1960년~1970년대에 군산역 플랫폼에는 군산발 열차가 처음 정착하는 역명이 새겨진 안내판 두 개가 마주 보며 서 있었다. 하나는 군산선 개정역이고, 하나는 옥구선 상평역이었다.
1959년 2월 10일 옥구선 기차 시간표를 보면 군산역에서 06시 20분 첫차를 시작으로 12시 50분, 17시 45분 하루 3회 출발하고, 옥구역에 도착한 열차가 승객을 태워 돌아오는 식으로 하루 왕복 6회 운행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간에 상평역에서 멈춘다고 하지만 11.8㎞밖에 안 되는 짧은 구간임에도 30~35분이나 소요되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농촌 인구의 도시 집중화 현상으로 승객이 감소하면서 1960년대 중반부터 옥구선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1965년 11월 내한한 세계은행[IBRD] 교통 조사단은 종합 보고서에서 옥구선을 비롯한 7개 노선은 적자 운영을 면하지 못하기 때문에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운행 횟수를 줄이면서 1980년대 후반까지 운행하다가 물자 수송 전용선으로 바뀐다.
군산 미군 비행장에 보급품을 실어 나르던 옥구선은 2001년 이후 화물 열차 운행이 중단되고 폐선 상태에 가깝도록 방치돼 오다가 2011년 4월 1일부터 비정기적으로 화물 운송을 재개하고 있다.
[페이퍼 코리아선[경암선] 수많은 애환과 사연, 역사가 서린 철도]
페이퍼 코리아선[이하 경암선]은 양지(洋紙) 원료와 생산품을 실어 나르기 위해 1944년 가설된 군산역~북선 제지 군산 공장[2.5㎞] 구간 철길을 말한다. ‘경암선’, ‘화전선’ 등으로도 불린다. 이 철길은 명칭도 북선 제지선, 고려 제지선, 세대 제지선, 세풍 제지선, 페이퍼 코리아선 등 험한 세월의 굴곡만큼이나 자주 바뀌어 왔다.
경암선은 개통 이후 1960년대 후반까지는 화물칸을 길게 연결한 증기 기관차가 하얀 연기를 토해내며 시속 10㎞~20㎞ 속도로 기적을 울리면서 오갔다. 1970년대 이후에는 황색 줄무늬가 선명한 디젤 기관차가 다녔다. 경암선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철길 마을을 말한다. 그러나 주변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애환과 서린 사연이 담긴 철도이다.
경암선은 짧은 단선임에도 경포천과 구암천을 지나는 교량 2개와 건널목 11개, 게딱지같은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철길 마을’[약 1.1㎞] 등을 지난다. 기차는 안전 수단으로 경적을 수없이 울려대며 하루에 2~4회씩 오갔다. 이 철길의 특징은 1944년~2008년까지 64년을 제지 회사에서만 사용하는 진기록을 남겼다는 것이다.
지금은 주택과 상가 건물이 답답할 정도로 빼곡히 들어섰지만, 1950년~1960년대만 해도 경암선 철길 주변은 논 아니면 밭으로 들녘이 펼쳐졌다. 논 사이로는 금강의 지류인 경포천이 ‘S’자를 그리며 굽이굽이 흘렀다. 그래서 봄이면 모심을 때 부르는 농부가 소리가 흥겨웠고, 여름이면 마른 논에 물을 대느라 구슬땀을 흘리며 수차[무자위] 돌리는 농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구 군산역에서 경암선을 따라 몇 걸음 떼면 왼쪽으로 일제가 설치한 화력 발전소 자리가 나온다. 해방 후에도 가동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한국 전쟁 후에는 변전소로 이용했다. 한때 미군 비행장에서 나오는 폐지 분리수거장으로 사용되다가 1967년 백화 양조[훗날 베리나인]가 입주해서 소주와 양주를 생산해 왔다. 당집이 있던 서래산이 감싸고 있어 주변이 음침했는데, 오랜 채석 작업으로 평지가 됐고 최근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세월의 칼날에 할퀴고 뜯겨나간 침목을 하나둘 세다 보면 잡초에 가린 교량이 나온다. ‘꺼먹다리’, ‘댓교’ 등으로 불리던 경포천 교량이다. 개구쟁이들 수영장이었던 경포천 오른쪽에는 1927년 일제가 전국 최초로 공식 규격으로 조성한 경마장[해방되던 해 11월 폭발 사고로 사라짐]이, 왼쪽[군산 경찰서 자리]에는 송진 공장이 있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는 화약 원료인 송진을 구하려고 한반도 명산의 소나무들까지 마구잡이로 잘라냈으며 당시 학생들은 수업 대신 송진 채취 작업에 동원됐다.
‘꺼먹다리’를 지나면 공동 우물과 미나리 꽝이 있던 자리에서 철길이 또 갈라진다. 1960년대 중반 군산 화력 발전소[7만 5천㎾] 연료 수송을 위해 개설한 화전선(火電線)이다. 이 선로도 많은 얘깃거리를 담고 있다. 땅속으로 묻혀버린 철로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하는 듯하다. 화전선은 1967년 3월 23일 화력 발전소 광장에서 열린 금강 대교 기공식 날 당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이 탄 특별 기동차가 지나간 철도이기도 하다. 사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당시 금강 대교 가설은 군산 시민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제 6대 대선에 출마한 박정희 대통령은 2천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 앞에서 금강 대교 필요성을 역설했고 참석자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기공식이 끝나기 무섭게 공사가 시작됐다. 한국 합판 작업장 옆에다 교각도 하나 세운다. 그러나 5월 대선과 6월 총선이 공화당 압승으로 끝나자 공사가 중단되더니 1968년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업 자체가 백지화되는 황당한 국책 사업이 되고 만다. 지금은 화전 자리에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가 들어서 있다.
문구점을 끼고 건널목을 건너면 1960년대 도시 변두리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철길 마을이다. 세월의 풍상에 나약해진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그야말로 기찻길 옆 오막살이 동네다. 탈색된 시멘트벽에서도, 녹슨 자물쇠에서도, 빨랫줄 집게에서도 옹색함이 느껴진다. 이 부근은 일제 강점기 공업단지로 길 건너에 있던 붉은 벽돌담의 성냥 공장과 합판 공장 자리에 들어선 현대식 대형 할인점과 비교되면서 애틋함이 더한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천년학」 촬영지였던 경암동 철길 마을은 1950년~1960년대, 당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황무지나 다름없는 이곳에 하나둘 터를 잡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주변이 논밭이고 큰 공장도 많았으며 구암 초등학교와 이웃하고 있어 자녀 교육은 물론 생활 여건도 좋았다. 따라서 법적으로 집이 들어설 수 없는 철길 주변 국유지임에도 건물이 마구 지어졌다. 그렇게 무허가 건물에 살면서도 주민은 꼬박꼬박 세금을 낸다고 한다.
마을이면서도 마을 같지 않은, 그래서 3차원의 세계처럼 느껴지는 철길 마을은 영화 촬영지였고, 텔레비전 방송에도 몇 차례 소개됐으며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의 출사지로 주목을 받더니 이제는 명소가 되었다. 봄에 거닐면 농부들의 농부가 소리가 들려올 듯하고, 가을에 거닐면 급우들과 다양한 표정의 허수아비 아저씨들을 흉보며 논길을 걷던 초등학교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마을이기도 하다.
철길 마을이 끝나는 지점은 금강 연안 로터리. 그곳에서 신호등을 지나면 경암선 종착지 페이퍼 코리아 회사다. 작은 교량이 놓인 구암천은 회사 울타리를 끼고 흐르면서 천연의 해자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 철길 마을도 결국 일제 식민 통치가 남긴 생채기로 아픈 역사의 일부일 터다. 열차 운행은 중단됐지만, 군산시는 철길 마을 부근을 관광지로 조성하기 위해 코레일과 협의 중이라 한다. 기적을 울리며 숨 가쁘게 달릴 그날의 꼬마 열차가 눈앞에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