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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민의 마음의 안식처, 월명 공원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001
한자 群山市民-安息處-月明公園
이칭/별칭 각국 공원,군산공원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해망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규홍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월명 공원 - 전라북도 군산시 해망동·신흥동·금동지도보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월명 공원 산책길 - 전라북도 군산시 해망동·신흥동·금동
특기 사항 시기/일시 해망굴 - 전라북도 군산시 해망동 1000-21 지도보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흥천사 - 전라북도 군산시 동산길 29 지도보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은적사 - 전라북도 군산시 설림3길 49 지도보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선종암 3층 석탑 - 전라북도 군산시 설림3길 49
특기 사항 시기/일시 은적사 5층 석탑 - 전라북도 군산시 설림3길 49
특기 사항 시기/일시 월명 호수 - 전라북도 군산시 소룡동 지도보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군산·장항 지구 해병대 전승 기념비 - 전라북도 군산시 해망동
특기 사항 시기/일시 수시탑 - 전라북도 군산시 해망동
특기 사항 시기/일시 바다 조각 공원 - 전라북도 군산시 해망동
특기 사항 시기/일시 채만식 문학비 - 전라북도 군산시 해망동 지도보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3·1운동 기념비 - 전라북도 군산시 해망동
특기 사항 시기/일시 점방산 봉수대 - 전라북도 군산시 소룡동 지도보기

[정의]

전라북도 군산시 신흥동해망동, 금동 일원에 걸쳐 조성된 근린공원.

[개설]

월명 공원각국 공원 또는 군산 공원이라고도 불린다. 금강 하구를 바라보며, 장계산과 월명산이 감싸고 있는 산기슭에 조성되어 있다. 전망대·산책로·어린이 놀이터·꽃동산 등의 공원 시설을 비롯해 개항탑·수시탑(守市塔)·의용비 등이 세워져 있으며, 그 밖에 흥천사와 측후소가 있다. 공원에서는 군산 시가지와 바닷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월명 공원 일대는 군산 시민의 휴식처로 많은 아낌을 받고 있다. 도심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산을 따라 개설된 포장 도로가 공원을 통과해 교통이 편리하다.

[군산의 개항과 함께 만들어진 각국 공원]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를 보면 현 군산 해양 경찰서 인근에 군산창군산진이 자리하고 있어 사람들이 모여 살았는데, 대사산[옛 측우소가 있던 산]과 수시탑이 있는 산에 공원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은 개항 이후부터이다.

1915년 지도를 보면 처음으로 공원의 명칭이 등장하는데 이곳이 바로 각국 공원이다. 그 위치는 현재의 군산 해양 경찰서 서쪽의 전망대가 있는 대사산(大師山)이다. ‘대사산’이란 명칭은 지금은 잊혀져 있는데 바로 이곳이 아마도 각국 조계 지역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1905년에 공원 지역으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각국 공원이라고 불렸던 당시의 공원은 넓이가 9,907평의 대사산[현 전망대가 있는 산]만 한정하는 좁은 지역이었다.

이후 각국 공원은 각국 조계 지역이 1914년 폐지된 후 명칭 중 각국 자를 떼어내고 군산 공원이라고만 불렀다. 당시의 지도에는 공원이라고만 적고 있다. 1933년에는 현 수시탑이 있는 산 20,125㎡를 매입해서 신공원을 조성하여 공원의 규모를 확대한다. 일제 강점기 군산 공원은 벚꽃이 만발하는 4월만 되면 군산 인근의 많은 일본인들이 소풍을 나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곳곳에서 일본 나막신을 신은 일본인들이 아침 꽃이라는 군산에서 만들어진 정종을 먹고 취하여 노래와 춤을 춰 무척 소란스러웠다고 한다.

[가슴 아픈 역사의 땅, 일본인들 월명 공원에 나무를 심다]

각국 공원이 생긴 후 일본인들이 제일 먼저 한 작업이 공원의 식수 작업이었다. 일본인들은 본래 이곳에서 자라던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어내고 벚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그들은 천황이 다스리는 모든 땅에 벚나무가 심어져 있길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월명 공원에 있는 벚나무가 일제 강점기에 심어진 것은 아니다. 벚나무는 수명이 60년밖에 안되어 일본인이 심어놓은 벚나무는 이미 죽었고 지금 있는 나무들은 1970년대 일본의 로터리 클럽이 벚나무 200주를 기증하여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일본인들이 벚나무와 함께 공원에 심은 것이 등나무였다. 지금도 과거 측후소 자리 옆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 옆에는 당시의 등나무가 남아 있다. 한때는 군산의 등나무가 동양 최대라고 하여 자랑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일제 강점기 군산의 공원은 해망동의 측후소에서 수시탑까지 이르는 작은 규모였으며 현재처럼 ‘월명 공원’이라는 명칭으로는 불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광복이 되고 6·25 전쟁 이후 무절제한 벌목으로 산에 나무가 너무 적어지자 수시탑에서 월명산, 점방산, 설림산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산림 보호 지역으로 정하고 ‘월명 공원’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다.

[도심에 숲을 안은 월명 공원]

월명 공원 일대의 식물 자원은 전반적으로 곰솔과 소나무, 리기다소나무가 폭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물오리나무, 밤나무, 상수리나무, 아카시나무가 함께 식재림을 이룬다.

산책로와 시설 주변에 왕벚나무, 은사시나무, 목련꽝꽝나무, 동백이 심어져 있다. 월명 공원은 일찍이 공원과 상수원으로 지정, 보호되어 이차림과 식재림이 울창한 숲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안정화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월명 공원의 중앙부에 위치한 수원지 주변에는 자연림에 가까운 졸참나무 군락이 분포하고 있으며, 수질 오염으로 서식지가 줄어든 삿갓사초 군락이 상류 쪽 습지에 분포한다. 희귀 식물에는 청사조와 쥐방울덩굴이, 특산 식물에는 개비자나무, 지리대사초, 갈퀴아재비, 병꽃나무, 털잔대, 벌개미취 등이 자연 상태로 분포하고 있다. 이는 도심 중앙에 위치한 숲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높은 비율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산시민의 휴식처이자 안식처, 월명 공원]

월명 공원은 군산시 중심에 자리 잡은 뛰어난 자연 환경을 자랑하는 시민 공원이다. 군산시 7개동이 연결되어 있으며 총면적은 778,600평으로 바다와 인공 호수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곳이며 벚꽃이 화려한 봄과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을 지니고 있는 사계절의 경치가 뛰어난 군산의 자랑거리이다. 수시탑, 월명산, 점방산 봉수대 등 어느 봉우리에 올라도 멀리 성산면으로부터 흘러오는 금강 하류 줄기와 만경강 그리고 금강 건너 충청남도 장항, 서천의 풍경이 아름다우며 서해의 섬들과 해지는 석양의 장관은 월명 공원만이 지닌 아름다움이다.

1990년 군산시가 월명 공원 조성 기본 계획을 확정해 2001년까지 3단계로 월명동을 비롯해 해망동·금동·소룡동·신풍동월명 공원 지역 일대 23만여㎡를 집중 개발하여 현재의 자연 공원을 조성하였다.

월명 공원을 둘러 보려면 해망굴 옆에 있는 흥천사에서부터 출발하는 방법이 좋은데 차량은 흥천사 앞 도로에 주차하면 된다. 흥천사에서 비둘기 집을 지나 수시탑에 도착하면 시원한 황해의 바닷 바람이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공원 순환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개항 100주년[1999년]을 맞이하여 조성한 바다 조각 공원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 조각 공원의 바로 옆에는 황해의 탁류를 바라보는 채만식 선생의 문학비를 만날 수 있고, 체육 공원에 있는 3·1운동 기념비에서 땀을 식힌 후 점방산 봉수대와 도심 속의 호수인 수원지를 지나 은적사에 이르러 은적사 삼층 석탑은적사 오층 석탑을 보면 아쉽지만 월명 공원의 모습을 어느 정도 살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월명 공원에서 가장 소중한 자랑거리를 꼽으라면 아름다운 산책길을 들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채만식 문학비에서 3·1운동 기념비까지 1㎞의 S자 길은 모든 이들을 명상가로 만드는 명상의 길이다.

월명 공원 산책길:

A 코스 [약 1.5㎞ / 1시간]

흥천사 - 해병대 전승탑 - 수시탑 - 바다 조각 공원 - 채만식 문학비 - 3·1 운동 기념탑 - 월명산

B 코스 [약 3.7㎞ / 1시간 30분]

청소년 수련원 - 월명 호수 - 점방산 봉수대 사적비 - 월명 공원 전망대 - 설림산 - 은적사

C 코스 [약 3㎞ / 2시간]

흥천사 - 수시탑 - 3·1 운동 기념탑 - 월명 공원 전망대 - 월명 호수 - 설림산 - 나운 배수지

해망굴 : 곡창 지대였던 호남 평야의 쌀을 반출하던 일본은 1926년, 군산 내항과 군산 시내를 연결하기 위해 해망굴이라는 터널을 만들었다. 해망굴은 당시 호남 평야 곳곳에서 수확한 곡물들이 군산 시내로 모였고 많은 양의 곡물들을 군산 내항으로 가져가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흥천사 : 월명산의 입구에 자리한 흥천사는 일제 강점기 안국사라는 이름의 일련종 계통의 사찰로 창건되었다. 안국사가 해방 후 귀속 재산으로 군산 시청에 인계된 후 6·25 전쟁에서 참전한 군경 전몰 장병의 영령을 봉안하는 사찰로 이용되다가 1964년 이정님 비구니가 군산시의 부탁으로 사찰을 인수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중창하였다.

은적사 : 월명 여자 중학교 뒷길로 월명산을 오르다보면 왼쪽 즉 설림산의 서쪽에 자리 잡은 조용하고 아담한 절이 있는데 이것이 은적사이다. 대형 버스도 절 입구까지 들어갈 수 있다. ‘은적사’란 불자가 해탈하기 위해 입적을 앞두고 은거하는 사찰이라는 데서 온 명칭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의 원광 국사마한국 삼기산에서 이 산에 와서 은거하여 은적사라 불렀다고 한다. 613년(신라 진평왕 35)에 원광 국사가 창건했다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이후 고려·조선·일제 강점기에 네 번 다시 지었다고 한다.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을 다시 칠할 때 몸속에서 유물이 나왔는데 이 불상은 약 700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본다.

은적사 삼층 석탑 : 원래 설림산 북쪽 선종암에 있던 것인데 일제가 군산 제 2수원지를 만들던 1912년, 공원에 옮겨놓았던 것을 1976년 은적사 대웅전 앞에 옮겨 놓았다. 절터는 수몰되어 흔적도 없다. 기단부를 제외한 1, 2, 3층의 옥개석들을 시멘트로 보강하면서 더 높게 만들었기 때문에 원상에서 많은 변형을 가져왔다. 기단은 단층이며 그 위에 하대석을 올려놓았다. 이 석탑은 현재 삼층이지만 원래 오층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옥개석의 3층 받침이나 추녀의 반전과 옥신의 각도로 보아 고려 시대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은적사 오층 석탑: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충청도 지방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높이가 4.40m로서 상당히 큰 작품이며 고려 시대의 것으로 추측된다. 기단은 단층 기단으로 지대석 한 변의 길이는 1.72m이다. 기단 면석은 네 장의 석재로 만들었고, 우주를 각출하였고 갑석은 부연이 노출되어 있고 부연의 안쪽에는 면석이 밀리지 않도록 홈을 파고 조립하였다. 또한 갑석 상면에도 1층 옥신의 하부를 따라 홈을 파서 빗물이 탑의 내부에 스미지 않도록 시설했는데 현 석탑의 남부에 배수 홈이 있다.

각층의 옥신석은 모두 한 장의 돌로 만들었는데 옥신석에 걸맞지 않을 정도 크기의 우주를 각출하였다. 옥개석은 3장의 옥개 받침이 나타나 있고 네 귀도 상당히 반전되어 있으며 옥신굄은 표현하지 않았다. 상륜부도 상당히 약화되어 5단의 받침 위에 보주를 올려놓은 형태이다.

◆ 월명 호수 : 군산 시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군산 제 1수원지라고 불렸고, 군산시의 중심지인 월명 공원 안에 위치하여 월명 호수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도심의 산 위에 위치한 호수이다.

◆ 군산·장항 지구 해병대 전승 기념비 : 비둘기 광장에서 수시탑에 오르는 중간의 오른쪽에는 하늘을 향해 치솟은 기념비를 만날 수 있는데 이 탑이 군산·장항 지구 해병대 전승비이다. 이 탑이 만들어진 내력을 보면 6·25 전쟁이 일어나고 7월 19일 군산 지역은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는데 이때 제주도에 주둔하던 해병대 고훈길 부대가 해군 함정으로 7월 16일 군산에 상륙한다. 고훈길 부대는 두 개조로 나뉘어 한 조는 해군 군산 경비부 육전대와 함께 군산에 비축되어 있던 정부 양곡 천 삼 백 여 가마와 기타 정부 물자를 해군 함정에 실어 후방으로 운반하였고 주력 부대는 금강을 건너 장항 북방 4㎞ 지점에서 주둔 중이던 대대 규모의 인민군에게 기습 공격을 가하여 적군 사살 62명, 사상자 311명, 포로 5명의 전과를 올렸다. 이를 기념하여 이 기념비가 만들어졌다.

수시탑 : 월명 공원의 기념물로 배의 돛과 불꽃을 상징하며, 시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 그러나 이 수시탑의 본래 명칭은 성시탑이라는 주장이 있다. 수시탑이 건립될 당시 군산시의 부시장이었던 방병기 씨에 따르면 수시탑은 1967년께 준공되었는데 당시 군산 경제가 매우 침체돼 군산의 경제 활성화가 절실해 군산 시민의 의지와 뜻을 모으는 취지에서 추진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수시탑의 명칭을 군산시의 번영을 뜻한다는 의미로 ‘성시탑(盛市塔)’이라 했다는 주장이다.

수시탑은 또 군산의 경제 활성화는 군산항에 선박의 입출항이 많아야 한다는 뜻으로 모형이 선박과 봉화 모양으로 설계되었다. 이 수시탑의 설계자는 당시 홍익대 교수로 알려지고 있으며 예산 부족으로 본래 설계보다 2m가 낮게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또 당시 설계자의 의도는 현 수시탑의 주변에서 4개의 조명을 비추면 봉화가 타오르는 모습이 재현되도록 설계하였다고 한다. 현 수시탑의 높이는 28m이다.

◆ 바다 조각 공원 : 수시탑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수시탑과 마주보고 있는 남쪽 봉우리의 정상에는 1,700평 규모의 바다 조각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바다를 상징화한 흰색 자갈 보도를 중심으로 잔디위에 전시된 구상 혹은 비구상의 다양한 대리석 작품들과 브론즈 작품 21점이 서해 바다를 배경으로 전시되어 있다. 이곳 바다 조각 공원은 군산 개항 100 주년을 기념하여 조성되었다.

채만식 문학비 : 1930년대 일본의 식민지 정책 구현의 전진 기지였던 군산·옥구 지방의 미두장을 배경으로 식민지 민족의 슬픔과 사회상을 처절하고, 풍자적으로 막힘이 없이 써내려간 『탁류』. 채만식『탁류』의 작가이다.

채만식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 31번지에서 1902년 채규섭과 모친 조우섭의 5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부속 제일 고등 학원 문과를 중퇴했다. 채만식은 빈곤과 실의 속에서 폐결핵으로 1950년 음력 5월 27일 49세에 세상을 떠났다.

채만식의 최초 작품은 「황금원」으로 1956년 4월 『현대 문학』에 발표된 유작으로 중학 졸업시에 집필한 것이다. 채만식은 그 후 「세길로」가 1924년 12월 『조선 문단』에 발표되면서 정식 문단 데뷔를 하였고 1950년까지 많은 희곡, 장·중·단편 소설, 수필, 꽁트, 동화 등 폭넓은 분야를 두루 섭렵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채만식의 대표 작품인 『탁류』는 1937년 『조선 일보』에 연재됐던 글로 채만식은 그 당시 1934년부터 해방 전까지 일본의 탄압이 날로 가혹해졌던 시기에 풍자성이 강한 작품을 많이 써 문학의 황금기를 누렸다고 후세인들은 평가한다.

군산 월명 공원 수시탑에서 3·1절 기념탑 쪽으로 100여 m를 가면 무선 송신소 앞에 그가 말했던 탁류가 흐르는 서해를 바라보며 서 있는 채만식 선생 문학비를 만날 수 있다. 1984년 6월 11일 세워진 것으로 홍석영이 글을 썼고 군산 문화원에서 건립한 것이라 한다. 비문의 뒷면에는 이러한 글이 쓰여 있다.

백능 채만식 선생은 이 고장이 낳은 작가로 그의 업적은 한국 문학사에 찬연히 빛나고 있다. 그는 1902년 옥구군 임피면 - 중략 - 그의 대표작은 탁류로서 1937년 조선 일보에 연재된 장편 소설로 풍자적 작품과는 달리 철저한 리얼리즘의 수법으로 세태의 묘사에 뛰어난 작품이다. 탁류의 배경은 이곳 항구 도시 군산이다.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농민이 어떻게 몰락해야 했으며 도시화 과정에서 한 고장의 삶의 풍속이 어찌하여 타락할 밖에 없었는가를 역사와 현실이라는 삶의 혼탁한 현장으로서 깊이 있게 표현되었다. - 중략 - 탁류는 한시대의 역사적 현장으로서 세태의 혼탁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인간의 탐구에 크게 기여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제 유서 깊은 이 고장 도도히 흐르는 바다를 굽어보는 자리에 정성을 모아 여기 한 돌을 세워 그 업적을 길이 추모하게 되었으니 기쁜 마음 그지없다.’

◆ 3·1운동 기념비 : 전라북도 군산시 명산동 사거리에서 군산 여자 고등학교 쪽으로 좌회전하여 100m쯤 올라가면 동신 교회가 나오는데 그 교회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20분쯤 걸어가면 밤나무가 많아 밤골이라고 부르는 데가 있다. 현재는 체육 공원이라 부른다. 체육 공원 바로 옆에 1986년 12월 3일에 세워진 3·1운동 기념비가 있고 7m정도 우측에 3·1운동 만세상이 있다. 길이 4m, 폭 1m정도다. 3·1운동 기념비에는 건립문이 아래와 같이 새겨져 있다.

‘푸른 숲이 기상을 상징하는 이 자리에 당국의 보조금과 시내 각급 학생을 비롯한 시민의 충정어린 성금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니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기에 지극하고 온갖 것을 다 바친 선인들의 슬기와 용맹이 우뚝 솟아 보인다. 군산의 3·1운동은 1919년 3월 6일 설애 장날을 기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영명 학교 교사와 학생 그리고 예수 병원 직원들이 주동이 되어 벌였다.

이날 시위에서는 그 전날까지 영명 학교 숙직실에서 밤을 지새우며 만든 독립 선언문 3천5백장과 태극기 5백장을 나누어 들고 휘두르며 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이밖에 군산 보통 학교 학생 수백 명이 합세, 애국 시위 군중은 삽시간에 5백 명으로 늘어 독립 만세 소리는 시 전역에 메아리쳤으며, 1919년 3월 30일 밤에는 시민 1천여 명이 횃불 시위를 벌여 일본인 관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1919년 3월 31일에는 투옥된 애국자들의 공판중인 법원 군산 지원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는 등 독립 운동은 나라를 빼앗긴 민족이 나라를 찾고 자존과 자주, 자립, 자유와 평화를 누리려는 최선의 길이요, 방법이었으며 마땅하고 엄숙한 주장이었다. 우리는 선인들의 애국심과 크나큰 의지를 오늘에 되새기며 자랑스러운 조국을 더욱 굳건하게 세워가야 할 것이다.

점방산 봉수대 : 해망동 바닷가에 우뚝 솟은 점방산[천방산 혹은 봉화재]은 해발 139m로서 부근에서는 가장 높은 산으로서 그 정상에서는 서해와 금강 하구 일대가 한눈 안에 들어온다. 정상에 바로 점방산 봉수대가 있었고 지금도 산 정상에는 봉수대의 터가 남아 있다. 고려 말 이후 왜구는 내륙 지방 깊숙이 침입해 들어와 식량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해안 일대에 배치된 봉수대는 군사적으로 중요했던 것이다.

점방산 정상에는 둘레 약 70m의 장방형의 모를 죽인 듯한 높이 3m의 돌을 섞어 쌓은 토단이 있고 토단의 남동쪽 아래쪽에는 160㎡ 남짓한 평평한 대지가 있었다. 이곳은 바닷가 쪽에서 불어 오는 강한 서풍을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것은 바람과 추위를 막고 의지할 수 있는 봉수군의 막사였던 것이다. 봉수대 터에는 사적비가 있어 확인이 쉽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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