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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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鄕老堂記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상동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494년 - 「향로당기」 필자 박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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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557년 - 「향로당기」 필자 박란 사망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541년 - 「향로당기」 저술 |
성격 | 기문 |
작가 | 박란 |
[정의]
1541년 청도의 진사 박란이 향로당(鄕老堂)의 건립을 기념하여 지은 기문.
[개설]
향로당은 조선 전기에 악질 향리(鄕吏)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로잡기 위해 지방의 품관(品官)들이 조직한 자치 기구이다. 유향소(留鄕所)·향사당(鄕社堂)·풍헌당(風憲堂)·집헌당(執憲堂)·유향청(留鄕廳)·향소청(鄕所廳)·향당(鄕堂) 등으로도 불린다. 향로당은 재지 사족층이 유교적 행사인 향사례(鄕射禮)와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통하여 새로운 차원의 향촌 지배를 모색하던 과정에서 건립된 것이다. 「향로당기」는 청도의 진사(進士) 박란(朴鸞)[1494∼1557]이 1541년에 향로당의 건립을 기념해서 지은 기문이다.
[구성]
「향로당기」는 향로당의 설립에 대한 논의, 향로당의 건립, 향로당이 지니는 의미, 당부의 말 등 크게 네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향로당기」의 첫 번째 단락에서는 향로당의 존폐 과정과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청도에서 향로당의 설치는 조선 건국 이래 시작되어 몇 차례 존폐를 거듭하다 1480년대 무렵 다시 세워졌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청도 향로당의 현황과 새로 중수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조선 건국 당시 향로당은 치폐를 거듭하다 향음주례와 향사례를 치를 건물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는데 1539년 박하담(朴河淡)[1479∼1516]이 주창하여 본격적으로 건립이 이루어졌다. 진사 박란 및 향중의 여러 사족들과 향로당을 건립하기로 의논하고 객관을 중수하여 향로당을 건립하였음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향로당 건립 후 즐거워할 만한 일 두 가지, 힘써야 할 일 두 가지, 두려워해야 할 일 한 가지를 당부한다. 즐거워할 만한 일은 고을 사람들이 모여 향음주례와 향사례를 치르는 것과 견문을 넓히고 잘못을 고칠 수 있는 것이다. 힘써야 할 일은 아전의 횡포를 바로잡는 것과 의리와 이치에 합당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두려워할 일은 사람들의 의론과 시비가 따르게 되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 단락에서는 주역(周易)의 서합(噬嗑)의 괘와 췌(萃) 괘를 들어 바른 도리로써 힘을 합칠 것을 당부하고 있다.
[특징]
‘기(記)’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기록한다는 의미이다. 건립 과정과 일자, 공력과 비용, 도운 사람들을 기록하고 뒷부분에 간단하게 의론(議論)을 붙이는 것이 기문의 정격(正格)이다. 후대에는 의론의 비중이 커지는 변체(變體)가 많이 등장한다. 「향로당기」의 경우는 의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의의와 평가]
박란의 「향로당기」는 박하담의 「향사당 상량문(鄕社堂 上樑文)」과 함께 재지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 질서의 확립에 대한 노력 및 성격을 보여 주는 자료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