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4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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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年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청도 지역에서 일어났던 청년 중심의 사회 운동.
[개설]
3·1 운동 이후 대중의 힘을 효과적으로 결집하고 항일 역량을 지속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조직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1920년부터 각 지역에 청년회가 조직되어 계몽적인 성격을 가진 실력 양성 운동 및 문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청도 지역에도 1920년 들어 청년 운동 단체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1920년 7월 청도 청년회가 설립된 이후 각 지역에서 청년 운동 단체가 조직되었다.
1927년 민족 협동 전선체인 신간회(新幹會)가 탄생하자 조선 청년 동맹은 협동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각 지역에 단일한 청년 단체를 결성하고자 했다. 1927년 후반에서 1928년 후반까지 각 지역에서 청년 동맹이 조직되었고, 1928년 7월에 이르러 청도 지역에서는 청년 단체를 통일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청도 청년 동맹이 조직되었다.
[변천]
청도 청년회는 1920년 7월 18일 청도군 공립 보통 학교에서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성현 청년회는 1923년에 창립되었으며, 본부를 송금동(松金洞)에 두고 있었고, 총본부 간사장은 이원우(李元雨)였다. 의우단(義友團)은 1924년 8월 도시춘(都是春)·강태찬(姜泰璨)을 비롯한 7∼8인의 발기로 조직되었다.
1925년 11월 청도 청년회는 혁신을 표방하며 운동 전선을 새롭게 정비하고 나섰다. 이러한 변화는 1924년 8월 조직된 사상 단체 의우단이 주도하였다.
풍각 수양단(豊角修養團)은 1924년 8월에 최성찬(崔誠贊)·박만수(朴萬守) 등 풍각면 송서동의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이다. 1927년 3월 9일에 정기 총회를 개최하고 풍각 청년회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1927년 3월 31일에 풍각 기독교 청년회로 변경하였다.
유천 청년회(楡川靑年會)는 1926년 8월, 권재복(權在福)과 김수천(金守千)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발기로 창립되었다. 1927년 4월 18일에 대성 청년회(大成靑年會)가 청도역 앞 노해준(盧海俊)이 운영하는 운송점 안에서 조직되었다.
1927년 민족 협동 전선체인 신간회가 탄생하자 조선 청년 동맹은 협동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각 지역에 단일한 청년 단체를 결성하고자 했다. 1927년 후반에서 1928년 후반까지 각 지역에서 청년 동맹이 조직되었다. 1928년 7월 20일에 청도 지역 각 청년회의 대표들은 『동아 일보』 지국 사무실에서 청도 청년 동맹 창립 준비회를 열었다. 각지의 청년회를 해체하고, 단일한 청도 청년 동맹을 조직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1928년 7월 30일 청도 지역 청년회는 ‘분립에서 통일’이라는 슬로건 아래 창립총회를 열고 청도 청년 동맹을 조직하였다.
[활동]
청도 지역에서 청년 운동은 청도 청년회의 활동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편이지만, 각 지역에서 조직된 청년 단체의 활동은 드러나지 않았다.
청도 청년회는 위생 사업·운동회·순회 연극·대강연회·토론회·금주 동맹 운동·소비조합운동과 같은 다양한 활동들을 펼쳤다. 즉 청도 청년회의 활동은 지·덕·체를 중시하는 교육·문화 활동, 그리고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 운동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교육·문화 활동으로는 체육 활동·순회 연극·강연회·토론회를 들 수 있다. 청도 청년회는 1921년 4월 8일 청도 공립 보통학교에서 운동회를 개최하였으며, 학예부는 1922년 2월 2일부터 순회 소인극을 열었다. 또한 청도 청년회는 1922년 2월 11일에 서상동(西上洞) 예배당에서 51회 대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922년 2월 25일 오후 7시에 청도면 서상동 예배당에서 정기 토론회를 개최하였는데 ‘운동이 승어학문(勝於學問)’이란 주제로 편을 갈라 토론을 하였다.
청도 청년회는 지식 계발과 문화 사업 외에도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22년 3월 7일에 조직된 금주 동맹회(禁酒同盟會)와 4월에 조직된 소비조합 의양사(宜陽社)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청도 청년 금주 동맹은 1922년 3월 7일 송정(松亭)에서 조직되었다.
소비조합 의양사는 청년회의 부속 사업으로 운영되었는데, 소민(小民)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이 밖에 청도 청년회는 위생 문제 해결에도 앞장섰다.
1925년 11월 청도 청년회는 혁신을 표방하며 운동 전선을 새롭게 정비하고 나섰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것은 1924년 8월 청도 청년회의 회원으로 조직된 사상단체 의우단이 주도하였다. 그래서 1925년 11월 청도 청년회는 회장제를 집행 위원제로 변경하였는데, 집행 위원들은 의우단의 집행 위원장 김봉(金烽) 등 새로운 사회운동가들로 구성되었다. 청도 청년회가 혁신을 표방하고, 청년 운동의 활성화에 나서자 새로운 청년회가 각지에서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1926년부터 조직된 유천청년회와 풍각 청년회, 풍각 기독 청년회, 그리고 대성 청년회 등이었다.
1927년 후반에서 1928년 후반까지 각 지역에서 청년 동맹이 조직되었다. 1928년 7월경 청도 지역에서도 청년 단체를 통일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왜냐하면 청도 청년회를 비롯한 각 지역의 청년 단체들이 분립하여 청년 운동 내지 대중 운동을 체계적으로 이끌지 못하는 한계를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1928년 7월 20일 청도 지역 각 청년회의 대표들은 『동아 일보』 지국 사무실에서 청도 청년 동맹 창립 준비회를 열었다. 그 후 7월 30일에 청도 청년 동맹은 창립총회를 열었고, 3개의 강령을 채택하였다. 첫째 청도 동맹은 전조선 청년 대중의 정치적·경제적·민족적 권리의 획득을 기할 것, 둘째 본 동맹은 전조선 청년 대중의 의식적 교양 및 훈련을 기할 것, 셋째 본 동맹은 전조선 청년 대중의 공고한 협력을 기할 것 등이 그것이다. 즉 청도 청년 동맹은 계몽적인 문화 운동에서 벗어나 청년대중의 정치적·경제적·민족적 권리를 획득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또한 청도라는 지역 단위를 벗어나 전국의 청년 대중과 공고한 협력을 통해 민족의 권리를 찾고자 하였다. 이는 청도 청년회가 민족 운동의 주체로 성장하였음을 보여준다.
청도 청년 동맹은 1928년 8월 8일 제1회 집행 위원회를 개최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청도 경찰서에서는 8월 7일 청도 청년 동맹 위원장 김갑수를 불러 창립 대회 당시에 선언한 강령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활동을 금지하였다. 이는 청도 청년 동맹의 활동에 큰 제약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