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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군 수암면 수암리 [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 ]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비석거리 만세운동은 경기도 내 주요 시위 중의 하나로, 1919년 3월 30일 오전 구 ...[碑立洞] 에서 18개 리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서 벌인 독립만세운동이다. 비석거리 만세운동은 이미 전날인 3월 29일 읍내의 비석거리 에 모이라는 통문을 각 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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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30일 오전 10시 비석거리 시위 현장이었던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현 안산시 수암동 ]은 구 안산치소(安山治所) 가 있던 곳으로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 보통학교, 향교 등이 집중되어 있던 곳이다. 이날 비석거리[碑立洞] 에는 당시 시흥군 수암면 의 18개 리(里)에서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1916년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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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지도된 운동이 아니라, 각 계층의 민중이 스스로 사상과 투쟁 방법을 통하여 일으킨 만세 운동이었다. 1919년 3월 30일 오전 10시 시흥군 수암면 비석거리[碑立洞] 에는 18개 리(里)에서 모인 2,000여 명의 주민이 윤병소(尹秉昭) · 유익수(柳益秀) · 홍순칠(洪淳七) · 윤동욱(尹東旭) · 김병권(金秉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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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지를 규합하고, 장소를 물색하며, 군자금 조달과 국내와의 연락 등, 학생운동의 방향 결정에 큰 공헌을 하였다. 안산 지역의 3·1운동은 1919년 3월 30일 수암면 비석거리 시위로 전개되었다. 이날 만세 시위는 유익수 , 윤병소 ( 尹秉召 )[농업], 홍순칠 ( 洪淳七 )[지주], 윤동욱 ( 尹東旭 )[농업], 김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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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인 농민의 반대 시위는 보이지 않고 있으나, 뒷날 3·1운동 때 비석거리 시위의 주동자의 한 사람인 홍순칠(洪淳七) 이 “우리가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 가 일시적으로 운영되었다. 1919년 3월 30일 오전 10시 수암면 에서는 비석거리[碑立洞] 에 18개 리(里)에서 2,000여 명의 주민이 모여 윤병소(尹秉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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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각 계층의 민중이 스스로의 사상과 투쟁 방법을 통하여 일으킨 만세운동이었다. 국권 침탈 과정에서 시작된 안산 의 수많은 항일 저항정신을 이어온 수암면(秀岩面) 비석거리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30일 오전 10시 구안산치소(舊安山治所)로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 보통학교, 향교 등이 집중되어 있는 비석거리[碑立洞] 에 18개 리에서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군자면(君子面) 지역은 장곡리(長谷里) 주민들이 3월 29일, 원곡리 와 죽률리 주민들은 4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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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봉문 은 1890년(고종 27) 지금의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 에서 출생하였다. 이봉문 은 1919년 3월 30일 당시 수암면 수암리 비석거리 에서 면민 2,000여 명과 함께 행진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순사의 해산 명령에 따르지 않고 태극기를 떠받들고 읍내로 행진하여 주재소·보통학교·면사무소·공자묘 앞에서 만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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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14일 정미칠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면직되었다. 이후 안산 화정 너빌 로 돌아와 있다가 1919년 3월 30일 당시 화정리 주민 30여 명과 함께 수암면 수암리 비석거리 에서 면민 2,000여 명과 함께 행진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순사의 해산 명령에 따르지 않고 태극기를 떠받들고 읍내로 행진하여 주재소·보통학교·면사무소·공자묘 앞에서 만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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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터 화정리 일대에, 이튿날의 독립 만세 운동 계획에 참가를 권하는 격문이 돌려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윤병소 는 3월 30일 오전 10시경 집합 장소인 수암리 비석거리 로 나아갔다. 이곳에서 유익수(柳益秀) · 홍순칠(洪淳七) 등과 함께 18개 동리에서 모인 2,000여 명의 대대적인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와리 사람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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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월장터 에서 600여 명의 주민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시흥군 수암면 비석거리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던 유익수(柳益秀) 는 인근 지역인 수원군 반월면 에서 만... 쪽으로 옮겨가면서 만세를 부르다가 해산하였다. 시위에 앞장섰던 유익수 는 일본 경찰에 붙잡혀 비석거리 와 반월장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1년 6월의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