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8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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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益秀 |
영어음역 | Ryu Yiksu |
이칭/별칭 | 유익수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정진각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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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
성별 | 남 |
생년 | 1870년 |
몰년 | 1926년 |
본관 | 진주 |
[정의]
개항기에서 일제강점기 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진주(晋州), 아버지는 유원형(柳遠衡)이다. 1870년(고종 7) 지금의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출생으로 3·1운동 당시에는 지금의 상록구 월피동에 거주하고 있었다. 묘는 상록구 부곡동에 있다.
[활동사항]
유익수는 3·1운동에 참여하였다. 전국적으로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1919년 3월 30일 능곡리의 윤병소(尹秉昭), 와리(瓦里)의 홍순칠(洪淳七), 화정리(花井里)의 김병권(金秉權), 수암리(秀岩里)의 이봉문(李奉文), 산현리(山峴里)의 윤동욱(尹東旭) 등과 함께 수암면 비석거리에서 인근 18개 동리 2,000여 명의 주민들을 인솔하고 선두에 서서 읍내의 향교·면사무소·보통학교 등을 돌면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본 경찰이 해산을 요구하며 총을 쏘려 하자 흥분한 군중들의 시위가 과격해지므로, 폭력의 자제를 호소하여 평화적 시위가 되도록 하였다. 유익수는 다음날에도 반월면 장날을 이용하여 주민 600여 명과 함께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곳에서도 시위가 과격해지자 “건물이나 기물은 우리 민족의 재산이므로 파손하지 말자.”고 호소하여 평화적 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5일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같은 해 5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소요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년으로 감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6년여를 병석에서 고생하다가 1926년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3년 대통령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