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7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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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師直 |
영어음역 | Han Sajik |
이칭/별칭 | 여온(汝溫),소곡(巢谷),공간공(恭簡公),정혜공(靖惠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응숙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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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
성별 | 남 |
생년 | 1695년 |
몰년 | 1778년 |
본관 | 청주 |
대표관직 | 지중추부사 |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여온(汝溫), 호는 소곡(巢谷). 아버지는 군수 한배후(韓配厚)이며 한배연(韓配淵)에게 입양되었다.
[활동사항]
한사직은 현재의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에서 태어났으며 이재(李縡)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21년(경종 1)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다가 벼슬길로 나아가 1740년(영조 16) 정선군수, 의금부도사, 정랑 등을 역임하였으며 1748년 형조정랑, 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1754년 증광시에 을과 1등으로 급제하여 60세의 나이로 예조정랑이 되고, 이어 지평, 정언, 헌납,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1756년 강릉부사에 재임 중 관동 지방에 대기근이 들자 녹봉에서 구휼미를 내어 수천 명의 기민(飢民)을 구제하여 그 치적으로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 뒤 1761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1763년 경연관으로서 경연에 불참했다 하여 원주목(原州牧)에 유배된 후 이듬해 풀려 나와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이후 대사헌·한성부판윤, 판의금부사, 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가는 등 왕으로부터 우로(優老)의 은전을 입었다.
[묘소]
묘소는 족보에 안산 광곡[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너빌]으로 되어 있으나 현존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