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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의 첫 이주민 단지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C010302
지역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민

반월공단과 시화공단이 들어서 있는 안산시는 다른 말로 이주민의 도시이다. 대규모 공단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넓은 공간이 필요했고, 이는 그 공간 위에 터를 잡고 살던 사람들의 이주를 전제로 하였다. 지금의 원곡동 역시 반월공단 조성 때 원주민을 수용할 이주 단지로서 조성된 지역이었다. 당시 원주민 이주 단지로 반월 신도시의 주거 지역 내에 7개소가 마련되었고, 사업이 시행될 때마다 발생되는 이주민은 7개의 이주 단지 가운데 가급적 원거주지에서 가까운 이주 단지에 택지를 분양하도록 계획되었다. 그렇게 하여 1986년 5월까지 43차에 걸쳐 총 2,398가구의 이주민에게 택지가 분양되었다.

안산시 반월신도시개발계획의 가장 큰 특징은 국내 최초로 개발구역 내의 토지를 전면 매수하는 방법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원주민들이 자기가 살던 지역에 재정착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다. 더구나 토지 보상액만 가지고는 분양받은 택지에 주택을 신축할 수 없었고, 또 농사만 지어 오던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금융경제에 익숙하지 않아 자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못하고 일상생활비로 소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욱이 원주민들 대부분이 고령이었고 별다른 기술도 없었으므로 직업 전환도 매우 어려웠다.

여러 가지 이유로 신도시 개발 이후 원주민들의 경제 생활과 직업은 새로운 변화에 직면했다. 우선 신도시 개발 이전 중농 이상의 원주민들 중에는 개발 이후 보상금으로 이주민단지에 집을 지은 후 나머지 보상금으로 재투자를 하거나 다른 지역에 전답을 마련해 안정된 생활을 구축한 계층도 있었다. 이들 중에는 별다른 직업 없이 고가의 토지를 일부 팔아 이자 소득으로 생활하거나, 농지를 사들인 후 대여해 주거나 상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이들은 신도시 개발로 기존의 경제 수준을 유지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한 수혜 계층으로, 안산 원주민들 중 극히 일부분이기는 하나 상층 계층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토지 보상액으로 주택을 신축하여 자기 집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안정적인 직업 전환에 실패하여 남의 농사를 대신 짓거나 공단에 취직하여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밖에도 토지 보상액으로는 주택 건축 비용을 충당할 수 없어 주택 부지를 외지인들에게 팔고 세입자가 된 원주민들도 있었다. 이들은 신도시 개발로 오히려 피해를 입은 사람들로 안산시 원주민의 주류를 형성한다. 이들 중 일부는 평택·서산·당진·수원·안양 등지로 옮긴 뒤 농사를 계속하거나 막노동 등에 종사하였다.

이처럼 신도시 개발은 원주민들의 주거 문화와 경제 생활, 직업 등을 다양하게 변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개발 계획의 속성을 예견하고 민첩하게 대처했던 일부 원주민은 급속한 경제적 상승과 사회적 지위 향상을 이룩하기도 했지만, 대다수 원주민들은 오히려 경제 생활 수준이 하락하였고, 극단적인 경우 도시 빈민층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초부터 반월공단이 본격적으로 가동하며 원곡동은 전성 시대를 맞이했다.

이주민 단지에 입주한 사람들은 공단에 취업하거나 건설 현장으로 일을 다녔다. 마을에는 복지회관과 동사무소가 생겨나고, 복지회관어린이집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개교하면서 점차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되었다.

반월공단에 취업하는 공장 근로자들이 마을에 몰려들면서 집 수요가 증가하자 공한지로 남아 있던 곳에 다가구 주택 건설 붐이 일었다. 방이 원활하게 공급되자 노동자들은 원곡동으로 더욱 몰려들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과 술집, 다방, 슈퍼마켓, 고용상담소, 은행, 병원을 비롯한 편의시설이 조성되면서 더욱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 집을 짓거나 가게 건물을 지어 분양하거나 세를 받으려고 몰려오는 외지 사람도 많았다. 그렇게 원곡동은 이주민 단지 초기의 황량함과 불편함을 극복하고 활기찬 기회의 땅이 되었다.

시내버스와 시외버스가 정차하는 주택 사거리 지역과 수도권 지하철 4호선과 연결되는 안산선의 안산역 입구는 사람들로 붐비는 장소가 되었다.

저녁에는 휘황찬란한 조명이 반짝이고, 거리는 젊은 사람들로 꽉 찬 동네가 되었다. 안산 지역 출신 이주민들은 나름대로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서로간의 유대와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여기저기서 돈을 제법 모은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 시기의 원곡동은 안산에서 가장 번화한 동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급격한 외지인의 유입은 범죄와 일탈을 야기하였고, 자본의 마력에 빠진 원주민들의 공동체 의식은 점차 힘을 잃어가기 시작하였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자 이를 외지인에게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한 사람들이 늘어났고, 어린 자녀들이 향락적인 요소에 노출되는 것을 염려한 부모들은 아이들을 전학시키기 위해 이사를 갔다.

다행히도 이 시기 원곡동 경제의 젖줄인 반월공단이 꾸준히 성장하면서 원곡동은 활력을 잃지 않고 외형적인 확장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점차 외국인 노동자와 같은 신흥 노동자의 집단지역이 되면서 원곡동은 여기저기서 새로운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진통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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