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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1654
한자 歷史
영어음역 Yeoksa
영어의미역 Histor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안산시
집필자 여성구

[정의]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경기도 안산시의 역사.

[개설]

안산은 예부터 서해안의 교통·교역의 중심지로서 다양한 문화가 교차하며, 풍부한 물화가 집산하던 곳이었다. 이러한 자연환경과 사회·경제적 배경을 바탕으로 학문·교육·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하였고, 외세에 대한 저항 의식이 높았다.

[선사인들의 자취]

안산에서 인류의 자취는 신석기시대부터 찾을 수 있다. 신길동 신석기 유적, 초지동 별망 패총은 이곳이 신석기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또 양상동·월피동에서 고인돌과 함께 삼국시대의 토기 조각이 발굴된 것으로 미루어 이곳은 청동기시대 이후 삼국시대까지 이어져 온 거주지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의 쟁패지]

기원을 전후하여 안산 지역은 마한의 세력권에 놓여 있었다. 마한 사람들의 자취는 양상동 토광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백제가 인천 지역을 장악하면서 안산 지역도 백제의 영향력 밑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5세기 초부터 6세기 중반까지는 다시 고구려의 지배를 받아 장항구현[또는 고사야홀차]이 설치되었다. 이때 서해안 방어를 위한 군사 기지로서 목내산성성곡산성이 축조되었다.

삼국 통일 이후 장구군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남양의 당은군과 함께 대(對) 중국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대외 교역의 거점은 초지동별망성이었다. 이러한 군사적·경제적 중심지라는 입지를 바탕으로 신라 말기에는 김긍필 같은 친신라계의 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다.

[고려 왕실의 외향]

고려 건국 후 장구군은 안산군이 되었다. 그러나 변함없이 대외 교역의 중심지여서, 잿머리[城頭] 포구에는 중국 상인들의 마을인 당인촌(唐人村)이 생길 정도였다. 김긍필의 아들 김은부현종의 장인이 되면서 덕종·정종·문종의 외향(外鄕)이 되었고, 주변 지역보다 일찍 군으로 승격하였다. 이를 계기로 향교가 설치되어 지역민들의 교육·문화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편 편리한 교통과 활발한 교역으로 물산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외적의 침탈을 받기도 하였다. 고려 말에는 남양만을 통하여 침입하는 왜구들을 방어하는 요충지였다.

[실학과 시·서·화의 산실]

1394년(태조 3), 조선의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면서 안산은 양광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조선 초기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 때, 안산 주민들은 이숙번의 세력 기반이 되어 난을 진압하고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갯벌의 개간이 활발히 이루어져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다.

17세기 초 김류·장유가 정계에서 물러나 인조반정의 거사를 꾀한 곳도 이곳이었다. 이러한 지역적 정서는 18세기 이후 실학과 문화 예술을 꽃피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익은 경세치용의 학풍을 내세워 많은 실학자들을 양성하였다. 특히 이익의 학풍은 가학(家學)으로 이어져, 조선의 언어·지리·역사·경학·예학 등의 분야에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 밖에 안정복·신경준·윤동규·정상기·신후담정약용·이벽·이기양 등이 이익의 실학사상을 이어받았다. 또한 정제두의 양명학과 유중림의 의학도 이곳에서 뿌리를 내렸다. 한편 이익의 아들 이맹휴와 조카 이용휴는 안산 15학사의 일원이 되어 이들과 함께 안산 문화의 부흥 시대를 열었다.

[일제에 대한 저항과 독립운동]

안산은 서해안 교통·교역의 중심지로서 외세의 주요 침탈로이기도 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전투가 풍도 앞바다에서 벌어졌으며, 1904년 남양만에 상륙한 일본군은 대부도의 말들을 강제로 징발해 갔다. 결국 1914년 일제는 안산군을 과천군과 합쳐서 시흥군으로 통합하는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에 대한 저항으로 안산의 마지막 유학자였던 유원성은 1907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구국의 일념으로 후학을 키우면서 많은 시문을 남겼다. 1919년 3월 30일 유익수수암면 일대의 홍순칠·김봉문·윤동욱·강경식을 규합하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해 안산인의 저항 의지를 드높였다.

이후 독립운동의 열기는 문화운동과 교육운동으로 나타났다. 안산 출신의 문인들은 안산 15학사의 명맥을 이어 전통문화를 복원하기 위해 『연성음사시집(蓮城吟社詩集)』(1926)과 『연성음사 제1회집』(1928)을 출간하였다. 1930년대에는 최용신이 천곡[샘골]에 강습소를 열어 교육을 통한 농촌 계몽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안산의 독립과 안산시]

일제강점기 안산 사람들에게는 조국의 독립과 함께 안산의 독립도 중요한 당면 과제였다. 광복 이후에도 안산은 계속 시흥군에 속하였다가, 안산이라는 이름을 다시 찾은 것은 1976년 경기도 반월도시개발지원사업소가 설치되면서부터였다. 1979년 수암면·군자면의 13개 리와 화성군 반월면 일부에 경기도 반월지구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6년 반월지구출장소가 안산시로 승격되었다. 이로써 이름을 잃은 지 73년 만에 다시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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