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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골과 일각정승」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1526
한자 東山-一脚政丞
영어의미역 Dongsangol Village and One-legged Prime Minister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집필자 이현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설화|지명유래담|효행담|풍수담
주요 등장인물 윤지완|윤지선|일각정승
관련지명 동산골|수암면
모티프 유형 동산골의 명명|동상 걸린 무릎|묘의 이장

[정의]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에서 동산골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동산골과 일각정승」윤지완(尹趾完)[1635~1718]이 한겨울에 동상에 걸려 한쪽 다리를 자르게 됨에 따라 일각정승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효행담이다. 윤지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682년(숙종 7)에 일본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일본에서는 조선의 사신 윤지완을 영접하기 위하여 정각을 지어 놓았다.

그런데 그 정각을 지나던 윤지완은 그 정각의 현판이 ‘시정각’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시’자가 일본의 신하, 즉 ‘일하인’이라는 뜻으로 해석해 그 정각을 다시 짓게 하고 현판도 새로 달도록 하였다. 이렇듯 윤지완은 외교사신으로 갔을 때에도 나라의 명예를 세우는데 큰 몫을 했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윤정승에게 충정(忠正)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그를 위해 현재의 동산골에 사당을 지었다.

[채록/수집상황]

1988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으로 현지조사를 나가 주민 윤기완[남, 60]으로부터 이한기가 채록하여 1990년 내고장안산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내고장 안산』에 수록하였다. 1990년 단원구 선부동 주민 민병기[남, 73]로부터 이정태가 다시 채록하여 1999년 안산시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안산시사』 중권에 수록하였다. 2008년 11월 이현우가 일부 오류를 정정하여 다시 정리하였다.

[내용]

동산골의 유래는 조선 중엽에 우의정을 지낸 윤지완의 사당이 이곳에 있어 그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호(雅號)인 ‘동산(東山)’을 빌려 동산골이라 했다고 한다. 윤지완의 형 윤지선은 좌의정을 지냈고, 윤지완은 우의정을 지냈는데, 형제 정승 중 동생 윤지완이 더욱 뛰어났다고 한다.

윤지완은 효심도 지극하였다. 부모님의 3년 상을 지내던 중 무릎이 동상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시묘하는 일에만 열중하였다. 그래서 그는 결국 다리를 잃는 고통을 당하였다. 그 후 사람들은 그를 ‘일각정승’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기이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나 묘소를 수암면에 두었는데 그때부터 서해바다에서는 조기가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여러 가지 궁리를 해 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떤 유명한 풍수지리가가 나타나 윤지완의 묘 때문에 조기가 잡히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윤지완의 묘를 옮겼는데, 그때부터 다시 조기가 잡히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동산골과 일각정승」의 주요 모티프는 ‘동산골의 명명’ ‘동상 걸린 무릎’, ‘묘의 이장’ 등이다. 윤정승의 사당이 있는 까닭에 동산골이라 명명했으며, 또한 무릎이 동상으로 썩어가고 있는데도 윤정승은 부모님의 3년 상을 치르기 위해 이를 치료하지 않아 결국 다리를 잃게 되어 ‘일각정승’이라 불렀다고 하는 효행담이다.

그리고 윤정승의 묘를 이장했더니 조기가 다시 잡히기 시작했다는 풍수담이기도 하다. 이렇게 「동산골과 일각정승」은 지명유래담, 일각정승의 유래와 효행담, 풍수담 등이 옴니버스식으로 합쳐진 설화이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 둔매미마을에도 윤정승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는데, 이는 바로 「둔배미의 윤정승」이라는 설화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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