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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산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813
한자 修理山戰鬪
영어의미역 Battle of Surisan Mountai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성포동|부곡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진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서울 탈환 전투
발생[시작]연도/일시 1951년 1월 23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51년 1월 31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수리산

[정의]

6·25전쟁 당시 수리산을 비롯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성포동·부곡동과 서해 연안에서 벌어진 전투.

[개설]

전투를 주로 담당하였던 터키군은 1월 29일 성포리를 점령하였고, 1월 30일 터키군 포병대와 미 포병대는 화정리의 마하산 지역을 공격하였다. 뒤이어 수일간의 공방전 끝에 유엔군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유엔군은 서울을 재탈환하였으며, 수리산전투의 전쟁터였던 안산 지역에서도 그 피해는 엄청났다. 6·25전쟁 당시 수암면군자면의 납치자 수만 해도 각각 81명과 141명에 달하였다.

[발단]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1951년 1월 중순 서부전선에서 펼친 위력수색작전에 이어서 반격작전의 계기가 조성되었으나 리지웨이 장군은 총공세작전으로 전환하기에 앞서 한강 남쪽에 배치된 적의 방어진지를 보다 명확히 파악하기 위하여 신중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l월 23일 한강 이남 지역에서 강력한 수색작전을 실시할 목적으로 ‘선더볼트 작전[Operation Thunderbolt]’이라고 명명된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작전은 파괴적 위력수색작전이라는 의미로 ‘선더볼트’, 즉 번개작전을 뜻한다. 그리고 사단이 2개의 기갑부대로 경부국도와 안양-소사-인천 도로를 따라 공격하여 한강선에 도착하기 전에 수리산(修理山) 일대를 점령하여 중공군에게 최대의 타격을 입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수리산 일대의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하여 군단은 31일에야 제3통제선에 도착하였다.

[경과]

미군 제8군의 서부전선을 담당한 미군 제1군단의 국군 제15연대, 미군 제25사단 제35연대, 터키 여단으로 편성된 공격제대는 1월 31일부터 안양 남쪽의 수리산과 모락산을 공격하였다. 수리산은 영등포로 통하는 국도와 반월리(半月里)를 거쳐 소사 또는 인천으로 통하는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고지였다.

첫날 수리산 부근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을 예상하였으나 의외로 쉽게 무혈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중공 제150사단과 주야로 수리산의 주인이 바뀌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치게 되었다. 사단은 적의 계속되는 증원과 야간 공격, 수류탄 공격은 물론 터키 여단과의 언어 장애로 말미암아 협조된 공격이 부진하자 사단 예비인 미제 27연대를 터키 여단 쪽으로 투입하여 수리산 일대의 일부 진지를 점령하고 작전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때 국군 제15연대도 31일 미국 전차의 지원 아래 2개 대대 병진대 형으로 모락산을 공격하였으나 미군 제35연대의 수리산 공격이 지연되어 일시 방어 태세로 전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공격 개시 5일 만에 치열한 백병전을 치른 끝에 이를 점령하였다.

[결과]

안산 지역에서도 수리산전투 당시의 포격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수암면 수암리의 민가가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1899년 개교한 안산국민학교는 교사와 부속 건물 일체가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이에 따라 근처의 고등공민학교의 교사와 향교를 빌려 수업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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