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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450
한자 金石文
영어음역 Geumseokmun
영어의미역 Epigraph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여성구

[정의]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명문(銘文).

[개설]

안산의 금석문은 석비가 대부분이다. 석비는 묘비와 기념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묘비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이 대부분이며, 묘표·묘갈이 가장 많고, 신도비는 강징·김여물·한응인·유석·윤강 등의 것이 있다. 특히 명안공주·오태주 부부합장묘에는 묘비와 함께 숙종이 지은 제문비가 있다. 그리고 기념비에는 선정비·공덕비와 근대에 세운 자선비 1기가 전한다.

[숙종어제치제문비]

조선 숙종이 누이동생 명안공주의 죽음을 슬퍼하여 지은 제문과 매제 오태주가 죽었을 때 지은 제문을 새긴 비석이다. 대리석의 몸돌[비신] 크기는 110×49×19㎝이며, 마모가 심한 편이다. 대략 비문의 내용을 보면, 명성왕후의 셋째인 명안공주가 죽은 두 언니들처럼 일찍 죽어서 슬프다는 내용이며, 오태주의 제문에도 그의 재주를 기리고 일찍 죽었음을 아쉬워하는 내용이다. 제문은 현재 강릉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신도비]

종2품 이상의 관리들에게만 세우도록 허락된 신도비는 강징(姜澂)[1466~1536]·한응인(韓應仁)[1544~1614]·김여물(金汝岉)[1548~1592]·유석(柳碩)[1595~1655]·윤강(尹絳)[1597~1667] 등의 5기가 전한다. 신도비는 죽은 해에 세워지지 않고, 김여물·한응인의 비는 30여 년 후에, 유석·윤강의 것은 40여 년 이후, 강징의 비는 사후 110여 년이 지나 각각 세워졌다.

비의 구조는 받침돌[기대석, 귀부]·몸돌·덮개돌[가첨석, 이수]로 이루어지며, 귀부와 이수 대신에 주춧돌 모양의 받침돌과 지붕 모양[한응인·유석·윤강]이나 용을 조각한 사각형[김여물·강징]의 덮개를 씌우기도 하였다. 몸돌의 윗면에는 비의 이름을 적는 전액(篆額)이 있다.

몸돌은 대리석이나 옥으로 만들었고, 크기·모양도 다르다. 비각이 마련된 곳은 한응인 신도비뿐이다. 비문의 내용은 죽은 이의 평생 행적을 기록하였고,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밖에 신점 묘역에는 이재(李縡)가 지은 비문을 1988년에 새로 만들어 세운 신도비가 있다.

[묘갈]

묘비 중 가장 많은 것이 묘갈이다. 묘갈과 묘표의 가장 큰 차이는 묘갈의 경우 끝에 명(銘)을 붙인 데 비해, 묘표는 거의 명을 붙이지 않는다. 묘갈의 내용은 죽은 이의 이력과 가족 관계, 관직 및 행적 등을 기록하고 있다. 대표적인 묘갈에는 홍명원(洪命元)·이경희(李慶禧)·홍처윤(洪處尹)·정언벽(丁彦璧)·상주황씨(尙州黃氏)·윤민헌(尹民獻)·오태주(吳泰周)·정시윤(丁時潤)·오원(吳瑗) 등의 것이 있으며, 이 밖에 유시행·유영·유적·이우량·이충가·이언항·이정제 등의 묘갈이 전한다.

시기별로 묘갈을 살필 때 비문의 내용에서는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고, 다만 구조적인 면에서 약간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17세기에 건립된 홍명원[1661년]·이경희[1669년] 묘갈을 보면, 덮개돌이 없고, 몸돌의 모양이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특히 이경희 묘갈은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18세기 이후의 정언벽[1702년]·상주황씨[1705년]·오원[1805년]의 묘갈은 팔작지붕 모양의 덮개돌을 얹었고, 오태주의 묘갈[1720년]은 사각 맞배지붕 모양의 덮개돌을 올렸다. 특히 상주황씨 묘갈의 덮개돌은 마치 나무를 깎아놓은 듯이 대단히 정교하게 만들어 당시의 석조 조각의 뛰어난 수준을 잘 보여준다.

[묘표]

대표적인 묘표에는 안탄대(安坦大)·명안공주·정찬흠(鄭燦欽) 등의 것이 있으며, 이 밖에 최담·최자준·최혼·최정걸·이잠·윤강·한응인·한경남·한유·이상신 등의 묘표가 있다. 안탄대 묘표는 1656년(효종 7)에 건립되었고, 몸돌의 크기는 159×56×23㎝이며, 재질은 흰 대리석이다. 전면에 “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겸영경연사안공지묘증정경부인황씨지묘(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安公之墓贈貞敬夫人黃氏之墓)”라고 쓰여 있다. 글은 신최(申最)가 짓고, 글씨는 신승(申承)이 썼다. 왕명으로 비문을 지었으며, 그의 행적과 당시 정치적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명안공주 묘표는 1688년(숙종 14)에 건립되었고, 몸돌의 크기는 144×67×35㎝이며, 글은 남편 오태주가 썼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묘지석]

묘비와는 별도로 죽은 이의 생애와 가족 관계 등을 기록하여 무덤에 묻는 묘지(墓誌)가 있다. 양상동 청주한씨 한용기의 무덤과 안동김씨의 이장묘[김수근·김병학·김병학·김정규·김용진]에서 백자의 묘지가 출토되었다.

[선정비]

안산시에는 4개의 선정비와 1개의 자선비가 전한다. 조선시대 안산군수였던 임세량·김철순·이겸진, 관찰사 박종기의 업적을 담은 비석들이며, 김철순 선정비는 군수 재임시에 세워졌다. 이들 선정비는 원래 수암동안산군 관아 입구의 도로변에 있었으나, 현재 수암동 파출소의 옆으로 모두 옮겨놓았다. 군수임공세량청덕애민선정비(郡守林公世良淸德愛民善政碑)는 1700~1704년까지 군수를 지낸 임세량[1651~?]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1705년(숙종 31)에 세운 비이다.

군수이공겸진청덕애민선정비(郡守李公謙鎭淸德愛民善政碑)는 1765년 정월부터 10월까지 군수였던 이겸진[1715~?]을 기리기 위해 1813년(순조 13)에 세워진 비이다. 군수김후철순애민선정비(郡守金侯徹淳愛民善政碑)는 1826년~1830년까지 군수였던 김철순[1771~?]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군수 재임시인 1827년(순조 27)에 세운 비이다.

관찰사임공종기영세불망비(觀察使林公宗琦永世不忘碑)는 경기도 관찰사 임종기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1827년에 세운 비이다. 중추의관이공찬자선비(中樞議官李公燦慈善碑)대부도의 대지주로서 재산가였던 이찬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1920년대 초에 세운 비이다. 비는 원래 그의 무덤 앞에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대남초등학교 앞으로 옮겨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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