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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413
한자 屯田
영어음역 Dunjeon
영어의미역 A Farm Cultivated by Stationary Troops
이칭/별칭 둔토(屯土)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근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1652년연표보기
시행연도/일시 1652년연표보기
폐지연도/일시 일제강점기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안산 지역에 군사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설치한 토지.

[제정경위 및 목적]

둔전은 주로 군사적인 목적에 따라 변경이나 국방 요지에 설치한 것으로, 안산 지역의 경우도 강화도의 수비와 관련해서 설치되었다.

[관련기록]

안산 지역의 둔전에 대한 기록은 『인조실록(仁祖實錄)』과 『국조보감(國朝寶鑑)』, 1808년 편람용으로 간행한 『만기요람(萬機要覽)』 등에 실려 있다.

[내용]

둔전은 원래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설치해 군량을 충당하기 위한 토지로, 농사도 짓고 전쟁도 수행한다는 취지에 따라 부근의 땅을 개간·경작해 군량을 현지에서 조달함으로써 군량 운반의 수고를 덜고 국방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한 것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둔전을 크게 국둔전(國屯田)과 관둔전(官屯田)으로 구별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둔토(屯土)라고도 하였다.

안산 지역에는 1652년(효종 3) 1월 안산에 부속된 섬이었던 덕물도(德勿島)에 민가를 모집하여 둔전을 개설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덕물도가 강화도의 문호(門戶)로 외적들로부터의 방어에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덕물도에 둔전을 설치하자는 논의는 인조 때부터 있었다.

즉 1627년(인조 5) 11월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인 김류(金瑬)가 모든 지역에 둔전의 법을 적용하기 쉽지 않지만 우선 설치가 쉬운 곳부터 시험해 보고자 주장하면서 덕물도와 장단(長湍)의 무지곶(無知串)은 땅이 비옥하고 강화도의 앞뒤를 호위하는 중요한 곳이므로 둔전을 설치하자고 건의하였으나 논의로만 그쳤다. 이후 1639년 7월 승지 이경의(李景義)에 의해서 다시 둔전 설치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다가, 효종 때 이르러 설치되었다.

설치 당시 둔전의 규모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순조 때 편찬된 『만기요람』에 “화성(華城)과 안산 지역의 둔전을 합쳐 53결 64부 8속을 화성으로 이속하였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보면 안산의 둔전은 조선 후기 이래로 존속한 것으로 추정되며, 폐지 시기는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없어지면서 안산의 둔전도 함께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둔전이 군사상 중요 지점에 설치되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안산 지역이 국방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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