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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도에서는 돈자랑을 말라고 했지요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E020301
지역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북동 종현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진호

소금은 공기 및 물과 함께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물질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김치나 국, 찌개 등을 통해 날마다 소금을 먹는다. 그렇다고 소금이 먹는 것에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길에 쌓여 있는 눈을 녹일 때, 옷감에 물을 들이거나 뺄 때,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일 때도 쓰인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소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알기는 쉽지 않다.

인간에게 소금은 없어서는 안 될 식품이기에 소금을 얻기 위한 인간의 노력도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바닷물을 말려서 소금을 얻었다. 특히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일조시간이 길어 소금을 굽는 데 유리한 지형적·기후적 조건을 지닌 경기도의 서해안에서는 오래전부터 소금을 제조해 왔다. 대부도에서도 예부터 소금을 제조해 왔는데 옛날의 소금은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오늘날 소금은 일반적으로 바닷물을 소금밭[鹽田]에 담아서 햇볕과 바람에 말려 얻어내는 천일염 제조 방식으로 얻어 낸다. 우리나라의 천일염 역사는 1907년 일본인이 중국인 기술자를 고용, 주안에 1정보 규모의 시험용 염전을 만든 데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천일염을 만들기 전에는 ‘벗염[군소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종현 마을에서는 아직도 천일염 이전의 소금을 기억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덜 어렸을 때, 그러니까 우리가 국민학교 다닐 때였지. 그 때는 벗염을 했어. 불 때서 하다가 지금 염전을 하게 된 거지. 불 때서 하는 걸 벗염이라고도 하고 화염이라고도 하고 그랬지. 그러다가 일본 사람들이 들어와서 염전을 하게 된 거야. 그때 염전을 바꿀 때 인부들한테 품삯을 줘야 하니까 돈으로 못 주고 인천에서 동태를 꿰어다가 그걸로 줬어.”

쟁기로 갯벌을 갈아서 밀물에 바닷물을 모으고, 그 결정체에서 순도 높은 소금물을 얻은 다음 이것을 커다란 가마솥에 졸여서 소금을 굽던 벗염[화염]은 천일염이 시작되면서 점차 사라졌다. 벗염을 굽는 데는 많은 인력과 장작용 나무가 필요한 데 비해 천일염은 보다 적은 노동량과 비용으로 더 많은 소금을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조선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천일염전을 대대적으로 개발하고 이를 전매 체제로 통제하여 엄청난 수입을 올리려고 하였다. 게다가 갯벌의 땅은 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염전 적지에 노동력을 투입하여 천일염전을 개발하고 이를 총독부의 수입 원천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때 경기도 서해안 인근에 염전이 대대적으로 조성되었고, 대부도의 염전들도 많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종현 마을의 염전은 모두 1950년대 이후 민간 사업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당시 종현 마을에는 구봉염전, 서호염전, 대봉염전 그리고 동태염전이라고 부르는 조그만 염전이 있었다고 마을 어른들은 기억하고 있다.

동태염전은 염전의 인부들에게 품삯을 돈으로 준 것이 아니라 칡넝쿨로 엮은 동태를 주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염전일이 힘들지는 않았는지에 대해서 묻자 마을 어른들은 과거의 힘든 기억을 조금씩 꺼내 놓았다.

“아, 힘들지. 그런데 안 힘든 일이 어딨어. 다 힘들지. 지금은 물 푸는 걸 다 기계로 하니까 훨씬 쉽지만, 그때는 수레차로 물 푸는 일, 소금 긁는 일 이런 일들을 다 사람들이 했지. 옛날에는 목도로 해서 창고에다가 붓거든. 그러면 소금창고에 쌓은 소금을 가마포장을 해서 구루마[손수레]에다 20개씩 싣고 나간다고. 구루마에다 20개씩 5개를 실으면 100가마잖아. 그러면 레일을 따라 방죽까지 나가서 방죽 앞에 배를 대고 거기서 실어서 갔어. 물이 얕으면 배를 못 대니까 사리 때에 배를 댔지. 그때 가마는 60㎏ 가마였지. 지금은 푸대에 담지만. 구봉염전 같은 경우는 제방 건너까지 배가 들어오니까 사리 때마다 싣는 거여. 조금 때는 못 싣지.”

당시부터 종현 마을 남자들은 모두 염전에 다녀서 다른 마을보다 경제적으로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긴 말이 “대부에서는 돈자랑을 말라.”는 것이었다. 예남돌 옹은 이런 말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대부도 사람들의 부지런한 노동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래도 다른 곳보다 괜찮았지. 염전 일도 하고 농사도 지으니까. 새벽에 일어나 논일을 보고, 염전에 나가서 일을 하거든. 그리고 저녁에 다시 돌아와 농사일을 마저 보는 거지. 안식구들하고 사니까, 여자들이 고생을 많이 했지. 여기는 농한기가 없어. 봄부터 가을까지 농사짓고, 농한기에는 굴 따고 조개도 캐서 힘들기는 해도 살기는 괜찮았지. 한 달에 품값으로 몇십만 원씩 염전에서 월급이 들어오니까 생활이 나았지.”

이렇듯 종현 마을 사람들이 다른 지역보다 잘 살 수 있었던 이유는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 부지런함에 있었다. 새벽부터 농사일을 보고, 다시 염전에 나가 고된 노동을 하고도 다시 틈틈이 농사일을 했다. 게다가 겨울철 농한기라고 쉬는 것은 아니고 갯벌에서 물고기와 조개를 잡아 팔았다.

마을의 남자 노인들은 이런 생활이 모두 집안의 여자들 덕분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남자들이 염전에 일 나가면 안식구들이 힘든 농사일을 해야 했고, 갯벌에 나가 조개를 캐는 일도 도맡아 했기에 다른 마을보다 고생을 더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1년 내내 쉬지 않고 일해서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집과 농토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얘기하고 있다.

보통 바닷물에서 소금 한 움큼을 얻기까지는 맑은 날을 기준으로 5일 동안 무려 스무 단계의 염판을 거쳐야 한다고 한다. 도시민들은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소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알기가 쉽지 않다. 소금을 만들기 위해 염부들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 우리가 먹던 소금에는 종현 마을 사람들처럼 부지런한 염부들의 고된 땀방울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정보제공]

  • •  예남돌(남, 1928년생, 대부북동 거주, 종현마을운영위원회 고문)
  • •  김복동(남, 1936년생, 대부북동 거주, 종현마을 노인회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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