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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재배법의 전래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B020101
지역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건건동 삼천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현우

2008년 현재 건건동 삼천리 마을은 무와 배추·상추 등의 채소를 재배하여 인근 군포시와 안양시에 공급하는 것을 주업으로 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는 고구마 재배지로 유명했다.

중남미가 원산지인 고구마와 감자는 조선 후기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감자보다는 고구마가 먼저 전해졌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18세기 중반 일본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몇몇 학자와 관리들은 중국 농서에 실려 있는 고구마를 재배하면 흉년이나 봄철 곡식이 떨어지는 춘궁기에 곡식을 대신할 구황작물로 훌륭한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 믿었다.

특히 서울에 살던 실학자 이광려는 중국으로 가는 사신과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를 통해 고구마를 들여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이광려가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어렵사리 구한 고구마는 이후 강필리 등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재배에 성공하게 된다. 강필리는 고구마 재배법을 담은 『감저보』를 펴내 우리나라 고구마 재배의 아버지로 불린다.

『정조실록(正祖實錄)』에는 1794년(정조 18) 서용보가 고구마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임금에게 장문의 글을 올린 것이 기록되어 있다. 서용보는 이 글에서 “달고 맛있기가 오곡과 같으며, 힘을 들이는 만큼 보람이 있으므로 풍년이든 흉년이든 이롭다.”는 명나라 서광계가 쓴 『농정전서』의 글을 인용하며,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처럼 나라에서 종자를 주어 백성들에게 재배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구마는 땅이 나쁜 곳이나 가뭄이 심한 때에도 다른 작물에 비해 잘 자라는 편이기에 벼가 잘 되지 않는 흉년이 든 해에 배고픔을 면하게 하는 작물이므로 흔히 구황작물이라고 한다.

삼천리의 고구마 묘(苗)는 일제강점기부터 전국에서 가장 품질이 좋기로 유명해서 각지로 팔려나갔다. 그렇다면 삼천리에 근대적인 고구마 재배법이 도입된 시기는 언제이고 누가 처음 도입했는지가 궁금해진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삼천리에 근대화된 고구마 재배법을 전파한 사람은 일제강점기 오오야마[大山]라는 일본인이었다고 한다.

당시 근대적인 고구마 재배 기술은 『매일신보』에도 소개가 될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다. 1934년 2월 9일자 『매일신보』는 “甘藷栽培를 實行하야 農村經濟를 潤澤[감저재배를 실행하야 농촌경제를 윤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삼천리에 보급된 감저[고구마] 재배법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기사 원문을 읽기 쉽게 고쳤음. 단 한글표기는 옛 표기를 그대로 사용함]

-甘藷栽培를 實行하야 農村經濟를 潤澤[감저재배를 실행하야 농촌경제를 윤택]-

……稻作 다수확 혹은 小麥과 大豆의 개량증식에 盡心全力을 하는 중인데 1,2배 증식으로서는 촌락민의 식량충실에 기여치 못함으로 연구하야 본 결과 농촌갱생에는 우선 식량충실이 근본문제이라는 것을 先覺하였으나 촌민의 반수 이상은 기술의 불충분으로 1, 2배의 수확을 보기는 難點이 잇고 맥작도 금일의 개량방법을 不知中에 있었던 관계상 반당 1석도 수확키 難한 산촌이 大山氏의 거주지이었다.

대산 씨는 식량충부를 달성할 급책(急策)으로 감저 재배에 沒頭하얏다. 대산 씨가 연구한 감저는 작물 중 재배(栽培) 용이(用易)는 물론이고 생산비가 근소하고 다량의 수확이 유(有)하며 병충해의 염려가 소(少)하다.

감저는 식량충실 생산작물이라 할 수 있는 합리적 신념하에 차(此) 재배법(栽培法)을 무한연구 하엿스나 차의 종자 저장에 양호치 못함으로 별별 방법 또는 일본식으로 하여 보앗스나 토질과 풍토관계상 도저히 되지 않음으로 소화 2년 3월에 지나 산동성 우점촌 지나인(支那人)을 庸人 하야 가지고 감저 기타 소채재배를 전문으로 식히고 촌민에게도 조석으로 재배법을 목격하게 함에 자극을 주었다.

일반 소채재배법도 잘 알게 되고 10월 하순 지나인 모씨는 산동성으로 귀국하고 기후로는 하등을 것 업시 저장방법을 숙지케외야 대산 씨는 이제야 희열이 충만하얏다 한다.

대산 씨는 이만하면 식량충실 할 만치 방법을 아랏스니 요촌(饒村)이 되는 제일보(第一步)를 걷게 되엿다. 기익년(其翌年)부터는 차(此) 방법(方法)으로 촌민에게 장려하얏다.

촌민 23戶는 대산 씨가 지도하는 것을 충심으로 지도 복종하야 감저재배를 양호한 방법으로 하고 잇다.

감저작부 면적은 소화 7년에는 4町 5反步 1만 6천9백 관 반당 75관의 수확을 하얏고 소화 8년 춘기에 백46만 본의 苗를 販賣하고 8년에는 作負面積 8정 8반으로 확장하야 3만 3천백80관 반당 375관의 수확을 보앗다 한다.

대산 선생이 주거하는 곳은 반월면 팔곡1리 남산평인대 지금은 식량을 구입한다든가 차입자는 一戶도 無하게 되고 춘궁을 모르며 농사에 열심히 매진하고 잇고 그리고 감저 매상대금만도 수확 직후에 1천5백 원이 되며 2,3월에는 판매가가 오십여 원 5월경에는 묘 매상대가 2천 원 합계 4천여 원이 남산평으로 수입하게 되엿다. 실로 대산 씨는 조선서 감저선생이라 할 것이다.

위의 기사 내용를 보면, 오오야마가 처음 삼천리 마을에 고구마 재배법을 도입한 것이 1927년(소화 2) 무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마를 재배하기 전의 마을 상황은 다른 농촌마을과 다를 바 없이 쌀농사와 보리, 콩 농사를 지었으나 그 수확량이 적어 마을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마는 재배가 쉽고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많으며 병충해의 염려가 적다는 점에서 부족한 식량을 충당하는 데 가장 좋은 작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고구마 재배 도입 초기에는 토질과 기후 풍토가 달라서 묘를 키우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오오야마는 다양한 방법과 일본식 방법도 도입해 보았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산동성의 중국인을 고용하여 고구마 재배법과 기타 다른 채소들의 재배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 중국인을 통해 씨고구마의 저장부터 고구마 묘 키우기, 묘의 옮겨심기, 비료주기, 수확까지 농사의 전 과정을 배우고 난 이듬해부터 마을 사람들에게 고구마를 장려하여 대대적으로 고구마 재배에 나서게 되었다.

이후 삼천리 마을은 오오야마의 지도에 잘 따라서 고구마 재배 면적은 해가 갈수록 증가하게 되었다. 1932년(소화 7)에는 고구마의 재배면적이 4정(町) 5반보(反步)에 16,900관의 고구마를 수확하여 반보(反步) 당 75관을 수확하고, 이듬해 봄에는 고구마 묘(苗) 146만 본(本)을 판매하였는데, 재배면적이 8정(町) 8반보(反步)로 두 배 이상 확대되고 단위면적당 생산량도 반보(反步) 당 375관을 수확하여 전년도의 75관에 비해 5배가 증가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고구마 재배의 성공은 마을의 경제를 윤택하게 만들었다. 1933년 삼천리의 고구마와 고구마 묘의 판매액이 4천여 원을 넘을 정도여서, 마을 사람 23호(戶) 중 식량과 돈을 빌리거나 춘궁기에 고통을 당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정보제공]

  • •  조희찬(남, 1930년생, 건건동 거주)
  • •  민병무(남, 1934년생, 팔곡동 거주, 전 반월면 면장)
  • •  장동호(남, 1946년생, 건건동 거주, 전 안산시의회 의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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