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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1656
한자 世居姓氏
영어음역 Segeoseongssi
영어의미역 A Family Name of Residing for Generations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안산시
집필자 정진각

[정의]

경기도 안산 지역에 오랜 기간 집단을 이루며 살아온 성씨.

[내용]

안산 지역은 1970년대 후반부터 공업 단지를 조성하며 기존의 마을이 소멸되었다. 현재까지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는 가문은 그리 많지 않다. 조선시대 안산 지역에 사패지를 받아 오랫동안 세거한 성씨로는 진주유씨, 파평윤씨, 전주이씨, 해주오씨 등과, 순천김씨, 양주최씨, 남양홍씨, 김해김씨, 단성이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안산시 성장 과정에서 타지역으로 이주해 갔거나 새로 조성된 안산 시내에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집성촌으로서의 의미는 퇴색하였다. 현재까지 세거성씨의 집성촌으로 남아 있는 곳은 안산시의 외곽 지역으로 양상동의 진주강씨, 화정동의 김녕김씨, 팔곡동의 여흥민씨, 안동장씨, 창녕조씨 등이다. 안산의 세거성씨에 대해 잘 기록된 문헌은 『연성성보』가 있다. 연성은 안산의 별호로 옛 안산 지역에 사는 성씨를 종합한 족보이다. 1857년(철종 8) 처음 편찬한 이래 1878년에 개수증보된 것을 1984년 다시 증보 간행하였다. 여기에서는 모두 50개 성씨의 73개 문중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옛 안산군 지역(수암, 군자 지역)만을 다루고 있다.

[전주이씨(全州李氏)]

시조는 신라 때 사공(司空) 벼슬을 하였던 이한(李翰)으로, 그의 22세손이 바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이다. 왕실의 조상에서 갈려 내려오는 계통을 선원(璿源)이라 부르는 까닭에 전주이씨의 족보는 「선원보(璿源譜)」라고 불린다. 전주이씨 가운데 15개 파의 후손들이 안산에 세거하였다.

즉 태종의 큰아들인 양녕대군(讓寧大君 )파,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녕대군(孝寧大君,)파, 태종의 여덟째 아들인 익녕군(益寧君 )파, 정종의 여섯째 아들인 진남군(鎭南君 )파,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 )파, 세종의 열넷째 아들인 수춘군(壽春君)파, 성종의 둘째 아들인 계성군(桂城君 )파, 성종의 여덟째 아들인 익양군(益陽君), 성종의 열여섯째 아들인 양원군(楊原君 )파, 중종의 둘째 아들인 해안군(海安君 )파, 중종의 넷째 아들인 영양군(永陽君 )파,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파, 선조의 넷째 아들인 신성군(信城君 )파, 선조의 아홉째 아들인 경창군(慶昌君 )파, 선조의 열둘째 아들인 인흥군(仁興君 )파가 그들이다.

[덕수이씨(德水李氏)]

시조는 고려 때 거란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던 중랑장 이돈수(李敦守)로, 덕수이씨는 조선시대 명문가의 하나이다. 학문으로 율곡(栗谷) 이이(李珥), 문학으로 용재(容齋) 이행(李荇)과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명장으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을 비롯하여, 상신(相臣)으로는 우의정 이단하(李端夏), 영의정 이여, 이조판서 이기진(李箕鎭), 영의정 이병모(李秉模) 등 수많은 명사들을 배출하였다. 이돈수의 10세손 적성공 이자하(李自夏)는 중종 때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벼슬을 버리고 안산으로 귀향하였는데, 그 후손들이 계속 안산에 세거하였다. 이자하의 아들 이치(李致)와 손자 이사성(李師聖)이 문과(文科)를 하였다.

[여주이씨(驪州李氏)]

시조는 고려 때 교위(校尉)를 했던 이인덕(李仁德)으로 그 11세손 이계손(李繼孫)[경헌공으로 벼슬은 병조판서]의 후손들이 안산에 살았다. 특히 16세손 이상의(李尙毅)[이조판서로 여흥부원군]의 후손이 번창하였는데, 장남 이지완(李志完)[형조판서], 5남 이지인(李志寅), 7남 이지안(李志安)의 직계들이 안산에 살았다.

이지안의 아들 이하진(李夏鎭) 및 손자 이해(李瀣)ㆍ이잠(李潛)ㆍ이서ㆍ이침(李沈)ㆍ이익(李瀷)의 다섯 형제가 모두 학문ㆍ문학ㆍ글씨 등에서 명성을 떨쳤으니 『성호사설』을 남긴 성호 이익은 조선 후기 실학의 개조(開祖)로 유명하다. 이들 형제의 후손 또한 모두 혁혁한 명성을 남겼는데 혜환 이용휴(李用休)는 재야의 문형(文衡)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재야 문단의 1인자였고, 그 아들 금대(錦帶) 이가환(李家煥) 역시 문학과 정치에서 큰 자취를 남긴 바 있다.

그 밖에도 ‘안산 15학사’의 한 사람인 연객(烟客) 허필의 매부,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 부자는 경학의 대가였다. 성호의 아들 이맹휴(李孟休)는 『연성동유록(蓮城同遊錄)』이라는 저술을 통해 당시 안산에 거주하며 학술ㆍ문학ㆍ예술 등등에 족적을 남긴 동시대 교유인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긴 바 있다.

또한 여주이씨 중 성호 이익의 7대조로서 제천현감을 지낸 이지시(李之時)의 큰형인 사헌부 감찰 이지임(李之任)의 8세손인 담촌(澹村) 이복휴(李福休)가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는데 안산의 반월방(半月坊)에서 세거하였다. 그는 20권의 방대한 문집과 장편의 『담촌악부(澹村樂府)』를 남긴 바 있어 현재 학계에서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이복휴의 아들이 구포(鷗浦) 또는 서호(西湖)라고 자호(自號)한 이현장(李炫章)이다.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을 지냈는데 필사본 문집 2책이 전하고 있다. 이들의 후손은 지금도 상록구 반월에 세거하고 있다. 안산에 있어서 이들 여주이씨 가문은 대단히 중요하다. 조선 후기에 안산이 문화운동사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 것은 성호의 학문과 그를 추종하여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을 일으킨 일단의 진보적 학자군(學者群)에 의하여 가능했기 때문이다.

[평창이씨(平昌李氏)]

시조는 고려 때 태사광록대부(太師光祿大夫)를 지냈던 이광(李匡)으로, 그 12세손 이계남(李季男)[ 익평공으로 벼슬은 이조판서]의 후손부터 안산에 세거하였다. 특히 17세손 이숙(李琡)의 후손들이 문과에 많이 급제하였다. 조선 후기 서학[천주교]의 수용에 앞장섰던 이승훈(李承薰)ㆍ이치훈(李致薰) 형제 및 신유사옥(辛酉邪獄)에 연루되어 24년간 김해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실학적 문학 성과를 남긴 이학규(李學逵)[혜환 이용휴의 외손자] 등이 이 집안 출신이다. 상록구 부곡동 등에 세거하였다.

[전의이씨(全義李氏)]

시조는 고려 태조의 건국을 도와 이등공신(二等功臣)에 봉해진 태사전산후(太師全山侯) 이도(李棹)이다. 전의이씨는 조선시대 상신(相臣) 5명, 대제학 1명, 청백리(淸白吏) 6명, 공신(功臣) 6명, 문과 176명을 배출한 명문가인데, 시조인 이도로부터 8세손인 전서공 이자화(李子華)의 후손이 안산에 세거하였다. 12세손 이계손(李季孫), 16세손 이경희(李慶禧) 등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신평이씨(新平李氏)]

시조는 고려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이덕명(李德明)으로 그 11세손 승지공 이계종(李季宗 )의 후손이 안산에 세거하였다. 계종의 2남 이세건(李世健)은 문과에 급제한 후 대사간을 역임하였는데, 장현동ㆍ장하동ㆍ화정동ㆍ논곡동 등에 폭넓게 세거하였다.

[한산이씨(韓山李氏)]

시조는 이윤경(李允卿)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으로부터 근세의 월남 이상재(李商在)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명사들을 낳은 명문이다. 이색의 손자 광목공 이숙야(李叔野)의 후손이 안산에 세거하였다. 11세손 이훈(李塤)-이유청(李惟淸)-이언호(李彦浩) 3대가 문과를 하였고, 16세손 이덕형(李德泂)은 좌찬성을 지낸 소북(小北)의 명문이다. 원세거지는 고양시 능곡과 교하 등지였지만 그의 후손들 일부가 상록구 장상동 등에 세거하였다.

[성주이씨(星州李氏)]

시조는 이순유(李純由), 중조(中祖)는 이장경(李長庚)인데 이장경의 5세손 영의정 이직(李稷)의 후손이 안산에 세거하였다. 손자 이함녕(李咸寧)ㆍ이정녕(李正寧)의 후손들이 크게 영달하였다. 단원구 와동 등에 세거하였다.

[연안이씨(延安李氏)]

시조는 당(唐)의 장수 이무(李茂)로, 그는 신라가 백제를 평정하던 때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을 따라온 중랑장(中郞將)이었다. 전쟁 후 신라에 귀화하여 연안후(延安侯)로 봉해졌다. 연안이씨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무려 250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이 가운데 상신 8명, 대제학 8명, 청백리 7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은 조선 초 연안이씨의 번성을 가져 온 중흥시조(中興始祖)로, 그 5세손 사복사정공 이화(李樺)의 후손들이 안산의 상록구 성포동 등지에서 세거하였다.

[용인이씨(龍仁李氏)]

시조는 고려의 건국 공신(功臣) 이길권(李吉卷)으로, 20세손 종형의 후손이 안산에 세거하였다. 특히 30세손 이숭호(李崇祜)-이재학(李在學)-이규현(李奎鉉)-이원명(李源命) 4대가 연이어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원명은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조선 후기 야담의 집성인 『동야휘집(東野彙輯)』의 편찬자로도 유명하다. 세거지는 상록구 장상동 등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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