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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1638
한자 追億-浪漫-挾軌列車
영어의미역 The Train on a Narrow Gauge With Recollection and Romanticism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신대광

[개설]

협궤열차는 일반적으로 건설 투자비와 운행비·보수비 등이 적게 들지만, 열차의 운행 속도가 낮고, 안전도에서도 광궤철도(廣軌鐵道)만 못하다. 이런 이유로 협궤열차는 교통량이 적은 지방철도로 사용되었으나, 교통이 발달한 뒤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원과 인천의 송도역을 잇는 수인선(水仁線)과 수원과 여주 간을 잇는 수려선(水驪線)이 있었다. 이중 수인선이 안산의 상록구 본오동단원구 원곡동을 지나갔다. 수려선은 1972년 3월 31일 폐선되었으며, 수인선은 경제성이 낮아져 1995년 12월 31일 폐선되었다.

[식민지배 정책을 등에 업고 성장한 철도산업]

일제의 식민지배 정책에 따라 기획, 부설된 한반도의 철도는 경부선·경의선·경원선·호남선·함경선 등 한반도를 X자로 종관(縱貫)하는 간선철도가 주를 이루고 있었으며, 군사 철도의 성격이 강했다. 조선총독부가 철도 운영을 직영으로 환원한 1925년부터 1941년 태평양전쟁 이전까지의 기간은 이른바 ‘한국 철도의 약진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새로운 선로의 건설과 이미 개설된 선로의 개량, 사철(私鐵)의 매수 등으로 운송망의 대폭적인 확충이 있었다. 철도 운영의 근대화에 큰 진전을 보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일제는 조선의 산업을 개발하여 식민지 수탈을 고도화하고 본토의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간접자본으로서의 철도망 확충을 시급한 현안으로 여겼기에 그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국유 철도 5개 선 860마일을 신설하고, 기존에 부설되었던 주요 사설 철도(私設鐵道) 5개선 210마일을 매수하여 국유화하는 방침을 내놓게 된다. 당시 사설 철도는 국유 철도 건설에 따른 재정상의 제약을 타개하고 식민지 수탈에 필요한 철도망을 신속히 완성하기 위해 민간에 그 건설과 운영을 장려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일제는 사설 철도의 건설과 운영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과 민간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보조금 제도를 두고 보조금을 지급하였다.

수인선은 사설 철도회사인 경동철도주식회사에서 부설하였다. 경동철도주식회사는 사설 철도의 부흥기에 조선총독부의 보조금과 매수 정책에 고무된 일본과 경동철도주식회사 연변 지역의 일본인 자본이 부설한 사설 철도였다. 이 경동철도주식회사는 1930년 수원~이천 구간을 개통한 이래 1931년 이천~여주 구간, 1937년 수원~인천 구간을 단계적으로 개통하여 인천에서 여주에 이르는 총 연장 125.4㎞의 철도 운송망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수인선은 왜 부설되었나?]

먼저 공사에 들어간 수여선은 1929년 12월 28일에 수원~용인 간 공사 착수 허가를 얻고, 이듬해인 1930년 2월 2일에 기공식을 갖는 등 본격적으로 공사에 돌입하였다. 수여선 부설공사는 2단계로 추진되었는데 1단계로 수원~이천 구간을 먼저 완성하고, 2단계로 이천~여주 구간의 공사를 진행하였다. 1단계 공사는 용인의 터널공사 구간에서부터 시작해 8개월 만에 종료되어, 1930년 11월 30일에는 개통식을 갖고 12월 4일부터 영업을 개시하였다.

수여선 부설은 경기도 내륙의 곡창지대와 경부철도를 연결하여 미곡 반출을 원활히 하고 일본인 진출 영역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의 수여선 철도 부설 목적이 일본 자본의 내륙 진출과 미곡의 반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수인선의 필요성은 인천 지역 상공인들이 처음으로 거론하였다. 그리하여 경동철도주식회사는 인천 지역 상공인들과의 협력을 통해 1935년 9월 23일 총독부로부터 수원~인천 간 철도 부설 인가를 얻게 되었다. 그 후 1936년 5월 16일에 종점 예정지인 인천 화정(花町) 매립지에서 성대한 기공식을 갖고 6월 1일부터 본격적인 부설 공사에 돌입하였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1937년 7월 19일 수인선은 완성을 보게 된다.

수인선은 착공한 지 1년 2개월 만에 개통을 하고 총독부의 영업 개시 허가를 얻어 1937년 8월 6일 정식 운행에 들어갔다. 총 연장 52㎞의 협궤선인 수인선은 17개의 정차장과 임시 정류장을 설치하고 수원~인천을 1시간 40여 분 걸려 달렸다. 개통 당시 총 17개소의 정차장 가운데 10개소는 정식 정차장으로 역사(驛舍)를 두고 역원(驛員)이 배치되었지만, 7개소의 임시 정류장은 역사와 역원이 없었다. 수인선 개통 당시의 정류장 역명은 수원, 고색, 오목, 어천, 야목, 빈정, 일리, 성두, 원곡, 신길, 군자, 소래, 논현, 남동, 문학, 송도, 인천항이었다. 1937년 8월 6일 안산 지역 정차장과 각 역과의 거리는 일리[정차장]~1.6㎞~성두[임시]~6.3㎞~원곡[정차장]~1.3㎞~신길[임시]~3.2㎞~군자[정차장]~6.2㎞~소래[정차장]이었다.

수인선은 개통 후 수여선과 연계하여 중부 내륙 지방과 인천항 간에 화물과 여객을 수송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는데, 초기에는 화물 수송이 주를 이루었다. 종전 하루 1~2편의 버스에 의존하던 때에 비해 수인선 개통 후 수원~인천 간의 인적·물적 교류는 획기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렇게 성장하던 수인선은 1940년부터 운송 수익이 적자로 돌아서면서 재정상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경동철도주식회사는 1942년 8월 조선철도주식회사에 매각되어 ‘경동선’으로 개칭, 운영되었다. 그 후 경동선은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에 접수되었다가 1946년 5월 17일부터 여타 사설 철도와 함께 국가 철도에 흡수되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새로운 교통문화에 밀려 고별을 고한 협궤열차]

1972년으로 접어들면서 정부는 만성 적자를 기록하던 철도 노선을 정리하기에 이르는데, 먼저 수원~여주 구간의 폐지를 결정하였다. 해방 후 한 번도 흑자를 내지 못한 채 적자 규모가 연간 2억 1천만 원에 달하던 수여선은 결국 그 해 3월 31일 마지막 운행을 끝으로 42년 만에 폐지되었다.

수인선 또한 같은 운명이었다. 1977년 국도 42호선의 포장을 계기로 도로 여건이 대폭 개선됨에 따라 화물 운송 기능이 대거 도로 교통으로 이동하면서 수인선의 쇠퇴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런 사정으로 화물 운송이 급감하자 1977년 9월 1일부터는 객차와 화차가 혼합된 증기기관차를 여객 수송만 전담하는 디젤기관차로 교체하면서 화물 수송을 전면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수인선은 주변 경작 농민이나 어민, 통학생 등의 제한적인 여객 수송 기능을 담당하며 겨우 그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운행 편수도 1961년까지 수원~인천 간을 5회 왕복하던 것이 1962년부터는 4회로 축소되고, 1990년대 들어 다시 3회로 축소되었다. 아울러 운행 차량수도 주중 2량, 주말 3량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1994년 9월 1일 철도청에서는 그나마 어렵게 운용되던 수인선을 송도~한양대앞 간 26.9㎞를 폐지하고, 이듬해인 1995년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 한양대앞~수원 간 20.2㎞의 운행을 중단하였다. 1930년 이래 경동철도사가 부설한 경동선 전 노선이 65년여 만에 운행을 마치게 된 것이다.

[열린 공간으로 변한 수인선 철길]

지난 1995년 12월 31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회면에는 「추억의 협궤열차 ‘마지막 경적’」, 「갈등도 슬픔도 모두 함께……」와 같은 기사가 실렸다. 58년 4개월간 쉼 없이 달려온 수인선 협궤열차의 마지막 운행 소식을 소상히 전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많은 안산시민들은 『조선일보』의 기사와 같이 수인선 협궤열차에 얽힌 수많은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학교에 등교하기 위해 새벽길을 가르던 통학 열차로, 혹은 포구에 젓갈을 사러가는 길이나 멀리 수원과 인천의 가족과 친척을 만나러 가는 길에, 때로는 행상하는 이들이 보따리 짐을 싣고 다니던 길에 그들의 희망을 함께 나르던 친구이자 발이 되어준, 달리는 삶의 터전으로서 말이다. 수인선은 비록 일제가 우리의 미곡과 소금을 빼앗아 가기 위해 만들었으나 오랜 세월 우리 지역 경제의 혈맥으로, 또 서민들의 삶의 애환이 녹아 있는 달리는 생활의 터전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2009년 현재 수인선 철로 변은 꽃길 조성 등을 통해 아련한 향수를 담은 시민들의 열린 공간으로 변하였으며, 수인선 협궤열차는 의왕철도박물관에서 안산 지역의 생생한 철도 역사를 침묵 속에 증언하고 있다. 안산시에서는 옛 협궤열차 철길 중앙역에서 중소기업연수원사거리까지 3.8㎞ 구간에 생태문화공간을 조성하여 시민들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4월의 유채와 보리, 7~8월의 해바라기 등 계절별 테마가 있는 식물을 파종하여 시민들이 무심결에 바빠진 걸음걸이를 잠시 멈추고, 여유를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또한 테마 식물 파종에 맞추어 고잔역 주변 협궤열차길 주변에서는 4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도심속 문화나눔 행사라는 작은 문화 공연과 즐길거리를 지역 시민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2009년 5월 23일 안산시에서 주최하고 안산시 생활체육협의회가 주관하여 한대앞역~용신1교[대동서적]까지 왕복 5.2㎞ 구간에서 3천여 명의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황토십리길 맨발로 걷기’ 행사가 있었다. 황토십리길은 옛 수인선 철로변, 용신교~한양대역 934m 구간과 용신교~용신1교 1,800m 구간의 산책로를 황톳길로 리모델링해 지난 1월에 완공한 것으로, 과거 협궤열차가 다니다 운행을 중단하면서 공터처럼 남아 있는 작은 길이다. “협궤열차 길 주변 황토십리길을 걸으니 옛 어린 시절 산길 넘어 먼 학교를 다녔던 추억이 떠오르네요.”라는 어느 시민의 말처럼 수인선 협궤열차는 여전히 안산시민들의 마음속에 아련한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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