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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1117
한자 丁若鍾
영어음역 Jeong Yakjong
이칭/별칭 양중(養重),아우구스티노
분야 종교/기독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근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천주교인
출신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성별
생년 1760년연표보기
몰년 1801년연표보기
본관 나주

[정의]

조선 후기의 천주교인.

[가계]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양중(養重)이고,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역임한 정재원(丁載遠),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 윤덕렬(尹德烈)의 딸, 처는 이수정(李秀廷)의 딸과 세레명 세실리아인 유씨이다. 동생이 정약용(丁若鏞)이며, 자녀들로 로마교황청에 의해 성인으로 추봉된 정하상(丁夏祥)과 성녀 정정혜(丁情惠)가 있다.

[활동사항]

정약종은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실학자 이익(李瀷)을 사사했으며, 권일신(權日身)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1786년 3월경 이승훈(李承薰)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천성이 곧고 모든 일에 정성을 쏟는 성격이라 천주교의 참된 이치를 깨닫고는 입교하여 천주교리를 깊이 연구하여 당대에서 가장 교리 지식이 뛰어났다.

1791년(정조 15) 전라도 진산의 선비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윤지충의 모친상을 당하여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가톨릭교식 제례를 지낸 것을 계기로 발생한 진산사건(珍山事件) 때 정약종의 형제와 친한 친구들이 배교하거나 천주교를 멀리하여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1799년 초에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하여 중국 교회의 평신도 단체를 모방하여 명도회(明道會)를 창설하자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어 많은 사람들을 감화·입교시키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광주(廣州) 분원(分院) 일대에서 살다가 1799년 한양으로 이사하여 문영인(文榮仁)의 집을 빌려 살았다. 1801년(순조 1) 초부터 박해가 일어나 포졸들의 추적이 심해지자 신변의 위험을 느껴 성상(聖像), 교리서적, 주문모 신부의 편지 등을 고리짝에 넣어 임대인(任大仁)으로 하여금 옮기게 하였으나 임대인이 발각되면서 1801년 2월 11일 함께 체포되었다.

고리짝의 내용물이 모두 자기의 것임을 시인하면서도 주문모 신부에 관한 일은 함구하였고 끝까지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하면서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함은 부당하다고까지 항변하다 끝내 대역죄인으로 다스려져 1801년 2월 26일(음) 이승훈(李承薰), 최창현(崔昌顯), 홍낙민(洪樂民)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는 『쥬교요지』 상하 2권이 있는데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여러 한문본 교리책에서 중요한 것만을 뽑아 누구나 알기 쉽도록 우리말로 쓴 것이다. 『쥬교요지』는 우리말로 된 최초의 천주교 교리서로 주문모 신부는 이 책을 중국의 교리서인 『성세추요(盛世蒭要)』보다도 훌륭하다는 칭찬을 하며 널리 권장하였다.

내용상으로는 상권에서는 천주(天主)의 존재, 불교와 도교에 대한 비판을 비롯한 35개의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하권에서는 천지창조를 비롯한 11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박해를 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교리서를 종합 정리한 『성교전서(聖敎全書)』가 있었다고 한다.

[묘소]

묘소는 본래 고향인 경기도 광주 마현(馬峴)[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배알미산에 있다가 1950년대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안골[內谷]로 이장되었다. 1981년 11월 1일 후손과 한국 천주교 발상지인 천진암성역화위원회 주선으로 한국 천주교회 창립을 위한 주역들의 영원한 안식처로 만든 천진암 묘역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4년 5월 6일 로마교황 바오르 2세 방한 때 천주교 성인(聖人)으로 시성(諡聖)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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