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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780
한자 安鼎福
영어음역 An Jeongbok
이칭/별칭 백순(百順),순암(順菴),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문숙공(文肅公),광성군(廣城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근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학자
출신지 충청북도 제천시
성별
생년 1712년연표보기
몰년 1791년연표보기
본관 광주
대표관직 동지중추부사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 아버지는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지낸 안극(安極),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이익령(李益齡)의 딸, 처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성순(成純)의 딸이다.

[활동사항]

안정복은 1712년(숙종 38) 12월 25일 충청도 제천에서 출생하였다. 4세 때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건천동(乾川洞) 외가에서 살았다. 이후 전라도 영광과 울산 등으로 옮겨가며 생활하다가 25세 때인 1736년(영조 12)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현 경기도 광주시 중대동 터골] 선영 곁으로 옮겨왔다. 덕곡에 우거하면서 『성리대전(性理大全)』, 『심경(心經)』 등 주자서를 독서하였다.

1738년 목민관의 지침서로 『임관정요(臨官政要)』의 초고를 저술하였다. 1740년에는 『하학지남(下學指南)』을 저술하였고, 1741년 『내범(內範)』을 저술하였다. 1746년 안산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성호(星湖) 이익(李瀷)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면서 뒤늦게 이익의 문인이 되었으며 이후 이익의 학문을 착실하게 전수함은 물론, 이미 이익 문하의 학자들과도 폭넓은 학문 교류를 하였다.

이후 안정복의 학문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38세 때인 1749년 3월 이익의 추천을 받아 동몽교관에 제수되고 같은 해 5월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같은 해 11월 만녕전참봉을 임명받고 12월에 부임하였다. 1751년 이후에는 의영고봉사를 비롯해 정릉직장(靖陵直長), 귀후서별제, 사헌부감찰 등을 지내다가 부친상을 당하여서 다시 덕곡에 칩거하면서 『동사강목(東史綱目)』을 편찬하였다. 1772년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에 제수되어 왕세자[뒷날의 정조] 교육에 참여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9월 목천현감(木川縣監)에 임명되어 2년 6개월 동안 봉직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1783년 돈녕부주부를 거쳐 장릉영(長陵令)을 지냈고, 1784년에는 의빈부도사와 세자익위사익찬을 잠시 역임하였다. 안정복은 노론 천하인 1790년에 종2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1791년 7월 20일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안정복은 천부적인 자질이 온화하고 순수하였으며, 정신과 풍채가 깨끗하고 밝았다.

[학문과 사상]

문인 황덕길(黃德吉)은 「순암선생행장(順庵先生行狀)」에서 안정복의 학문 세계에 대해 “선생은 학문을 함에 있어서 먼저 본원(本源)을 함양하였으며, 특히 성찰(省察)하는 것을 부지런히 하였다. 그리하여 학문과 사변(思辨)에 있어서 독실하게 하고 시청(視聽)과 언동(言動)에 있어서 부지런히 하면서, 순박하고 진실한 바탕 위에서 순서 있게 차근차근 공부해 나갔다.

정밀한 의리와 요약된 경지에 이르러서는 명백하고 광대한 근원을 분명하게 보았다. 그러므로 크게는 천지와 음양의 운행을, 세밀하게는 새와 물고기, 동물과 식물의 모든 사물을, 멀리는 고금의 치란(治亂)과 인사(人事)의 변천을, 가까이로는 성정(性情)의 은미함과 일상생활의 동정(動靜)과 어묵(語默) 등에 이르기까지 우주 안의 모든 사물의 소이연(所以然)의 이치와 소당연(所當然)의 법칙이 만 갈래이면서도 근본은 하나인 것을 두루 보고 하나로 관통하여 절충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라고 평하였다.

안정복은 정통 유학에 바탕을 두고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여 당시 성호학파 내에서는 일부가 양명학이나 천주교에 심취한 것과는 달랐다. 당시 조정에서 천주교나 양명학에 대한 탄압의 기미를 보이자 안정복은 성호학파의 붕괴를 막고 학자들의 신상을 걱정하여 양명학이나 천주교로부터 손을 떼도록 온갖 회유와 설득을 다하였다.

그러나 당시 젊은층의 서양 문물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개혁사상을 꺾을 수는 없었고 이를 염려한 조정에 의한 천주교 박해가 전면적으로 시작되었다. 1763년 이익이 타계한 뒤 이병휴(李秉休)와 윤동규(尹東奎) 등의 성호 문인의 원로들마저 각각 1766년과 1773년 세상을 떠남에 따라 안정복이 원로로서 성호학파를 이끌어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저술 및 작품]

시문집으로 『순암선생문집(順庵先生文集)』이 있다. 주요 저술로는 경학과 관련된 『하학지남(下學指南)』을 비롯해 규중의 규범을 기록한 『내범(內範)』, 옛 사람들을 논한 『희현록(希賢錄)』, 예학을 정리한 『가례집해(家禮集解)』, 주자의 춘추필법에 바탕하여 저술한 역사책인 『동사강목(東史綱目)』 등이 있다. 기타 『시명물고(詩名物攷)』, 『홍범연의(洪範演義)』, 『잡괘설(雜卦說)』, 『소학강의(小學講義)』, 『사감(史鑑)』, 『열조통기(列朝通紀)』, 『임관정요(臨官政要)』, 『광주지(廣州志)』, 『목주지(木州誌)』 등의 저술이 전한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중대동 텃골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01년(순조 1) 천주교 탄압에 앞장선 노론 벽파(僻派)로부터 천주교 비판의 공을 인정받아 정2품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광성군(廣成君)에 추봉되었다. 이런 이유로 안정복은 성호학파의 남인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1871년(고종 8) 3월 문숙(文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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