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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734
한자 韓浚謙
영어음역 Han Jungyeom
이칭/별칭 익지(益之),유천(柳川),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문익공(文翼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강응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557년연표보기
몰년 1627년연표보기
본관 청주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川). 증조부는 정선군수 한승원(韓承元), 할아버지는 한여필(韓汝弼), 아버지는 경성판관(鏡城判官) 한효윤(韓孝胤), 어머니는 예빈시정(禮賓寺正) 신건(申健)의 딸이다. 인조의 장인이다.

[활동사항]

한준겸은 1579년(선조 12) 생원과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585년에 태릉참봉에 천거되었으며, 이듬해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가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이때 선조가 유신(儒臣)에게 글을 지어 올리라 함에 장원을 하여 문장으로 이름을 높였다. 1588년 주서가 되고, 이어 봉교, 전적으로 올라 금천현감(衿川縣監)이 되었으나 곧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정여립의 사위인 이진길(李震吉)을 천거한 죄로 파직당하고 옥에 갇혔다가 한 달 여 만에 풀려 나와 원주로 내려갔다. 1592년 다시 서용되어 예조좌랑이 되고 사서(司書)에 임명되었다가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가 되고, 이어 예조정랑으로 원주목사가 되었다. 이듬해 처가 후에 인열왕후(仁烈王后)[인조의 비]가 된 딸을 낳고 죽었다.

1594년 지평, 필선, 지제교,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이 되어 평안도와 황해도를 순찰하고, 이어 교리, 보덕, 검상(檢詳), 사인, 집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97년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를 도와 식량과 마초(馬草)를 보급하였으며, 명나라의 제도를 본따 파발(擺撥)의 설치를 건의하였다.

1599년 경상도관찰사로 나아갔으나 정인홍(鄭仁弘)과의 알력으로 파직당하였다. 이듬해 병조참판겸동지춘추관사로 서용되고, 이어 사도체찰부사(四道體察府使)를 겸하였다. 1602년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이어 예조참판, 이조참판, 대사성, 대사헌, 평안도관찰사 등 내외의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른바 선조의 유명(遺命)을 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고향에 돌아가도록 놓여났으며 1617년에 충주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가 1621년 여주(驪州)로 양이(量移)[죄를 감하여 주는 뜻으로 가까운 곳으로 옮김]되었다. 이 해에 여진의 침입 기미가 있자 지중추부사로 서용되고 오도도원수가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딸이 인열왕후에 책봉되자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하고 돌아와 지춘추관사로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편찬을 명받았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호위대장으로 왕세자의 분조를 따라 전주까지 시종하였고 한양으로 돌아와 병이 깊어져 세상을 떠났다. 한준겸은 예학(禮學)과 국가의 고사(故事)에 밝았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유천유고(柳川遺稿)』가 있다.

[묘소]

묘소는 본래 강원도 원주에 있었으나 1636년(인조 14)에 안산 대월리[현 시흥시 거모동]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신도비는 이정귀(李廷龜)가 글을 짓고 오준(吳峻)이 글씨를 썼으며 전액(篆額)은 김상용(金尙容)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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