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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439
한자 現代
영어음역 Hyeondae
영어의미역 Modern History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학

[정의]

1945년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경기도 안산 지역의 역사.

[개설]

1945년 광복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경험하였다.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으로 인한 분단, 한국전쟁, 자본주의의 발전, 민주화운동 등을 경험하는 역사 속에서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여 이제는 통일 시대를 대비하고 있다. 안산 지역 또한 급격한 도시화의 진행과 함께 현대적 요소를 두루 갖추며 1986년 안산시로 승격하면서 첨단 산업·문화 도시로 발전을 지속하고 있다.

[행정구역]

1949년 8월 15일 대통령령 제161호에 따라 수원군 반월면화성군 반월면으로 개편되었고, 1976년 10월 2일에 반월신공업도시 건설 계획안 발표로 같은 해 12월 31일 경기도 반월도시개발지원사업소 조례가 공포되어 1977년 1월 11일 군자면 거모리에 경기도 반월지원사업소가 설치되었으며, 1978년 10월에 반월신도시 개발지원사업소가 개설되었다.

1979년 8월 10일 경기도 조례 제969호에 따라 경기도 반월신도시개발 지원사업소가 경기도 반월출장소로 승격됨과 동시에 수암면고잔리·부곡리·와리·월피리·양상리·성포리와 군자면의 원곡리·선부리·원시리·신길리·성곡리·목내리·초지리 및 반월면의 일리·이리·사리·본오리·팔곡2리가 반월출장소에 편입되었다.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1985. 12. 28 공포]에 따라 현재의 안산시로 승격되었으며, 이후에도 안산시는 여러 차례의 행정구역 개편을 거듭하여 현재의 안산으로 발돋움하였다.

[해방 정국]

1945년 8·15 광복 직후부터 전국에서 자주민족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안산을 포함한 각지에서 항일 인사와 지방 유지들을 중심으로 치안유지회·건국준비회 등 다양한 자치조직들이 결성되어 일제 행정기관을 접수하고, 자치적으로 치안을 유지하였다. 이 무렵 다른 대부분 지역처럼 안산에서도 다양한 대중단체 결성을 통해 대중들은 정치적 참여를 시도하였다.

당시 수암·군자·대부·반월 등 안산 지역의 대중운동은 지역 특성을 반영하는 농민운동이었다. 안산 지역의 농민도 한국의 농촌 현실에 따라 전개된 농민운동에 적극 참가하였지만, 당시 대중운동이 군(郡)을 단위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하여 활발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대한적십자부녀회 시흥군지부가 10월 27일에 결성되었고, 군자면 등에서 어업 문제 및 일부 염전 문제가 제기되었다.

광복 이후 안산 지역에서는 많은 학교가 설립되었다. 수암면 장상리의 부락회관 건물에 안산고등공민학교가 설립되었고, 1947년 2월 1일에는 군서초등학교가 군자면 정왕리 산139번지에서 개교하였으며, 그해 4월 30일 안산공립국민학교 화정분교가 화정국민학교로 승격하여 수암면 화정1리 519번지에서 개교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안양일동학원과 논곡학원을 설립하는 등 민족교육에 투신하였던 최긍렬은 1950년 시흥시 논곡동에 군자고등공민학교를 열었다.

이 학교는 이듬해 시흥시 장현동으로 이전하였다가, 1952년 시흥시 거모동 산58번지에 4개 교실을 건립하여 정착하였고, 1954년 군자중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1952년 4월 22일에는 군자국민학교 장곡분교가 장곡국민학교로 승격되어 군자면 장곡리 514번지에서 개교하였고, 이듬해 9월 18일에는 군서국민학교 오이도분교가 군자면 정왕리 911번지에 설립되었다. 1954년 1월 23일에는 군자중학교가 군자면 거모리 산58번지에서 개교하였다.

한반도를 둘러싼 좌우 갈등은 안산 지역에서도 극단적으로 표출되었다. 새로운 우익단체인 대동청년단 시흥군지부가 1947년 10월 2일 수암면에서 결성되자, 이에 대항하여 수암면 일대에 자생적인 민족주의적 계몽단체로서 파악동인회(波嶽同人會)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김완종·유보형 등을 중심으로 독서 토론과 연극 공연 등의 계몽활동을 벌여나갔으며, 이를 통해 좌우 이념대립을 타파하고 민족 단결을 목표로 삼았다. 또한 과거 좌익 가담자를 포섭함으로써 이들을 대동청년단의 테러로부터 보호하려고 노력하였다. 이후 파악동인회는 대동청년단을 견제할 만한 역량을 키우기 위해 조선민족청년단에 가입, 안양지부로 모습을 바꾸었다.

1948년 3월 17일 미군정장관은 ‘법령 제175호의 부록 제1호’로 선거구를 발표하였는데, 안산 지역의 선거구는 수원군 갑선거구에 반월면이 들어갔고, 그 외 시흥군과 옹진군에 일부 배정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남한 단독선거에서는 좌익계와 중립계 및 일부 민족진영이 불참하여, 긴장된 분위기 아래 미 군정청이 마련한 「국회의원선거법」에 따라 치러졌다. 광복 이후 안산 지역의 최대 관심사는 소작제도 개선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미군정이 종식되고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헌법에 의하여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법률로 정하여 농지 개혁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6·25전쟁]

6·25전쟁 개전 초기부터 후퇴를 거듭하던 유엔군은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대반격을 개시하였다. 유엔군은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여 9월 20일에는 한강을 도하하여 행주산성을 장악하였고,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였다. 10월 1일에는 국군이, 10월 7일에는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였다. 38도선 돌파는 마침내 중국군의 개입을 초래하였다.

중국군은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군의 참전에 뒤이은 북한군과 유격대의 총반격에 의해 미군과 국군은 11월 말부터 총 퇴각하였고 전세는 다시 한 번 역전되었다.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이 점령당하였다. 1951년 1월까지 미군과 국군은 다시 38도선을 넘어 안산을 거쳐 안산·평택·안성·삼척 부근까지 후퇴했다가 서울을 되찾기 위해 반격을 개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수리산 전투이다.

수리산 전투는 1951년 1월 28일부터 2월 4일까지 수리산[474m]을 비롯한 성포동·부곡동과 안산의 서해 연안에서 벌어졌다. 전투를 주로 담당하였던 터키군은 1월 29일 성포리를 점령하였고, 1월 30일 터키군 포병대와 미국 포병대는 화정리의 마하산 지역을 공격하였다. 뒤이어 수일간의 공방전 끝에 유엔군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유엔군은 서울을 재탈환하였으며, 4월 초에 전선은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수리산 전투의 현장이었던 안산 지역의 인적·물적 피해는 엄청났다. 한국전쟁시 수암면군자면의 납치된 사람 수만 해도 각각 81명과 141명에 달하였다. 수리산 전투 당시의 포격으로 인한 물적 피해도 매우 컸다. 이때 수암면 수암리에서 안산 최초로 1912년 개교했던 안산초등학교는 교사와 부속 건물 일체가 전쟁으로 파괴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안산초등학교는 근처의 고등공민학교의 교사와 향교를 빌려 수업을 진행하였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미국·유엔과 북한·중국 사이에 휴전회담이 개최되었는데, 이후 무려 158회, 만 2년을 끌다가 마침내 1953년 7월 23일 지금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여 포로의 자유 송환을 주 내용으로 하는 휴전협정을 조인하였다. 1952년 4월 25일에는 제1대 읍·면 의회 선거가 있었다. 당시 시흥군에 속해 있던 수암면군자면에서도 선거가 치러졌다. 수암면에서는 의장 김종덕(金鍾悳), 부의장 김환(金煥) 외 11명의 의원이, 군자면에서는 의장 장세만(張世萬), 부의장 민찬기(閔讚基) 외 12명의 의원이 선출되었다. 소속 정당별로 보면 수암면에서 자유당 11명, 무소속 2명이었고, 군자면에서는 자유당 5명, 무소속 9명이었다.

[1970년대]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화성군 북쪽 끝의 반월면과 그 위쪽의 시흥군 수암면 일대는 서울과 그리 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목받지 못하던 지역이었다. 그런데 1976년 10월 2일 정부는 반월신공업도시 건설 계획안을 발표하고 여러 가지 후속조치를 취하였다. 먼저 1977년 1월에 경기도에서 이 지역의 행정사무를 맡을 사업소를 세웠고, 1979년 8월에는 정식으로 ‘경기도 반월지구출장소’를 세웠다. 산업기지개발공사가 정부에서 융자해 주는 자금을 포함해 모두 4,500억 원을 이곳에 투자해 땅을 사들였고, 시가지와 공장이 들어서는 데 필요한 기본 시설을 조성한 후에 이를 다시 입주 희망자들에게 팔았다.

정부가 발표한 계획에 따르면 반월은 공업 지역이면서도 그림 같은 전원도시를 지향하였다. 57.8㎢의 땅에 인구 20만~30만 명이 모여 살 주택가·업무지역·공업단지 및 녹지대로 짜임새 있게 구성될 예정이었다. 주거지역 안에는 시장·학교·공원·운동장 및 자연녹지가 함께 들어서도록 하였다.

업무지역, 곧 사무실이 들어설 구역에는 관공서·공공기관 등과 함께 종합병원과 문화시설·오락시설을 비롯해 종합운동장까지 들어서며, 건물들의 크기와 높이를 제한하여 도시 전체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또한 시민들이 마실 수돗물과 공장에 쓰일 공업용수는 팔당댐에서 들여올 계획이었고, 무엇보다 공업단지에서 쏟아져 나올 폐수는 하수처리장을 만들어 공업도시이면서도 오염과 공해가 없는 쾌적한 도시를 계획하였다.

[1980~2000년대]

안산시는 우리나라가 최초로 시도한 인공계획도시로서 당초에는 그림 같은 전원공업도시로 설계되었다. 즉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도 캔버라시를 모델로 삼아 한국에서 제일 살기 편하고 제일 살기 좋으며 제일 쾌적한 도시로 만들려고 했었다. 이러한 기본 구상 아래 인공도시인 캔버라가 그러한 것처럼 인구도 20만 명 선으로 묶으려 하였고, 도시의 기반시설을 비롯해 문화·의료·복지·교육·체육·환경 등도 이에 맞추려 하였다.

이러한 인공도시가 시(市)로 출발[1986년 1월 1일]한 지 20여 년 만에 안산시는 몰라보게 변모하였다. 1970년대 이후 서울로 집중되었던 도시 인구를 분산 조치하기 위한 정부의 신도시 정책의 일환인 안산도시개발계획으로 1986년 시 승격 당시 12만 7000명이었던 인구가 1994년에 46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도시 개발이 거의 완료되기 시작한 1995년 이후부터는 인구 증가율이 현저히 감소하였음에도 2000년 57만 5000명, 2002년 63만 7000명, 2003년에는 67만 1000명으로 1986년 시 승격 이후 약 5.2배가 증가하였다.

또한 신도시개발 2단계 계획에 따라 고잔뜰의 개발이 진행되었다. 개발 면적은 약 283만 평, 수용 인구는 14만 명, 주택은 3만 7,800세대에 이르며 사업 기간은 1992년부터 2001년까지 10년간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대부도·안산동·화정동·반월동 등이 새로 안산시에 편입되었다.

[현황]

2007년 12월31일 기준 안산시 주민등록인구는 73만 4713명으로 전년 대비 1.5% 증가, 세대수는 26만 9,534세대로 전년 대비 3.5% 증가하였다. 이러한 시세(市勢)의 변화에 걸맞게 도시의 기반시설은 물론 행정·문화 등의 질적 향상을 위해 안산시는 여러 가지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깨끗하고 늘 푸른 친환경 생태도시 조성, 품격 높은 문화·예술·체육 도시 구현, 인재육성·평생교육의 메카 안산 조성, 꿈과 희망의 복지도시 실현, 편리하고 안전한 행복도시 건설이 그것이다.

현재 안산시는 서해안 산업 벨트와 남부 R&D 벨트가 교차하는 중심지로 변하였다. 국토개발계획에 따라 서해안고속도로가 생겼고, 인접지역에 여러 개의 국가공단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안산시가 자연스럽게 21세기 지역 및 국가 경제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할 지역, 21세기 서해안 공업 벨트의 중추도시로 뚜렷하게 부상한 것이다.

안산에는 종합사립대학으로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가 위치하고 있으며, 안산공업대학·안산1대학·서울예술대학 등의 전문대학이 있어 연구 인력과 고급 두뇌가 풍부한 편이다. 또한 주변에 인천의 남동공단과 아산과 평택 등의 공업단지와도 위치가 인접하여 산·학·연 연계성이 다른 지역보다 탁월하다. 첨단산업단지인 안산 테크노파크 컨소시엄 대학만 해도 안산 소재 한양대학교를 비롯하여 6개교나 되어, 대학과 기업, 연구기관이 한 덩어리가 되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상품화시키며 시너지 효과를 높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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